이어령 前 장관 “이제 팔순… 아껴뒀던 인문학 얘기 보따리 풉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8일 03시 00분


50년 활동 ‘구술 기록’ 나서

팔
순을 맞는 내년을 은퇴 시점으로 잡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26일 일생 동안 펼쳐온 연구를 구술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강의를 
하고 있다. 5월부터 시작한 이 ‘은퇴 강의’는 동영상으로 녹화한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팔 순을 맞는 내년을 은퇴 시점으로 잡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26일 일생 동안 펼쳐온 연구를 구술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강의를 하고 있다. 5월부터 시작한 이 ‘은퇴 강의’는 동영상으로 녹화한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해녀들은 제일 좋고 큰 전복들을 나중에 따려고 남겨놓죠. 은퇴를 앞둔 나도 너무 늦기 전에 아껴뒀던 얘기들을 하겠다는 거예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5월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생활 속의 인문학 이야기’ 강의를 하고 있다. 팔순을 맞는 내년을 은퇴 시점으로 잡은 이 전 장관이 50년 넘게 이어온 인문학 활동을 정리하는 자리다. 모든 강의는 동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문화게릴라처럼 활동해왔는데 내년 팔순을 앞두고 매듭을 짓고 싶습니다. 대학이나 학계에 알리지 않았던 것이 많은데 이 기록물이 후학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기록을 남기기 위한 강의이지만 청중 없이 하는 강의는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을 것을 염려해 적은 수의 청중만을 초청하고 있다. 26일 강의 주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영인문학관 제1전시실에 출판사 관계자와 이 전 장관의 이화여대 제자 등 20여 명이 자리를 잡았다. 이 전 장관은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신체시로서 중화사상(대륙의식)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반도의식’을 갖고 바다를 바라본 시”라고 역사적 의미를 조명했다.

“관념론자들이 너무 강해도 나라가 망하고, 빵과 서커스만 주는 실용론을 좇으면 로마 후기처럼 망한다” “우리나라는 끈질긴 선비 나라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이만큼 먹고살게 해주면 정치에 대해 그만하면 잘했다 소리도 나올 만한데, 그런 소리가 안 나온다. 한국에서는 정치하기 힘들고 내가 정치를 일찍 그만둔 이유도 거기 있다”라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85분 내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으며 쏟아낸 열강이었다.

한숨 돌린 이 전 장관과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눴다. 그가 은퇴를 생각하며 ‘구술 기록’에 나선 까닭이 궁금했다.

“오늘 파워포인트를 썼는데 사실 이게 남들 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보려고 하는 겁니다. ‘올드포인트’인 셈이죠. 이젠 강의 중에 헛말이 나오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은퇴(해야)할 때 은퇴하는 게 좋은 겁니다.”

이 전 장관은 ‘80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콘텐츠 제작업체와 방송사 등에서 그의 일생을 정리하자는 제안이 들어와 내년 공개를 목표로 작업 중이다. ‘생활 속의 인문학 이야기’ 강의도 이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빨리 조로합니다. 거의 100세까지 살지만 사회적 연령은 오륙도(50, 60대)로 끝이에요. 팔십이 돼서도 20대처럼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자신의 뒤늦은 연구 정리에 대해선 “우리 문화시스템의 불행”이라고 했다. “누가 내게 연구비를 1, 2년간 주며 문화적 투자를 했더라면 이렇게 부산떨지 않아도 상당한 학문적 업적이나 기여를 했을 텐데…, 사방에 끌려 다니고 인사만 하고, 중요하지 않은 자리에서 그 아까운 시간을 다 버렸어요.”

노태우 정부 때 문화부 장관(1990년 1월∼1991년 12월)을 지낸 그는 “문화전문가들이 정치, 경제를 기웃거리지 않고 평생 학문하는 토양이 마련돼야 한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초지일관하게 일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나도 장관을 하기는 했지만 잘한 짓이 아닙니다. 행정가보다는 내 일을 더 했으면 더 좋은 글을 많이 썼을 것 같아요. 사회 참여가 반드시 정치 참여가 아니라 내가 잘하는 것을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데 말입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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