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학년(한국의 중 2년)인 아스나카치 케타초 양(15)은 16일 기자와 처음 만났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국에서 왜 자신에게 장학금을 주느냐고 반문했다. 한국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었다.
“한국요? 으음… 잘 모르겠어요. 잘사는 나라라는 것 정도?”
이런 아스나카치 양이 국가보훈처에서 매달 지급하는 장학금을 받게 됐다. 17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6·25전쟁 참전 60주년 기념식에서 장학금 수혜자 215명의 대표로 장학증서를 받았다.
아스나카치 양의 할아버지 몰라 에레크 씨(1994년 작고)는 6·25전쟁 때 두 차례에 걸쳐 참전했다. 1951년 제2차 ‘칵뉴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던 몰라 씨는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동부전선의 춘천 일대에서 싸우다 1952년 귀국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로 전사자가 속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듬해 다시 자원입대해 두 번째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할아버지의 6·25전쟁 참전 얘기를 듣고서야 아스나카치 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데 사실 저는 할아버지를 잘 몰라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라고 말했다.
아스나카치 양의 장래 희망은 의사라고 했다. 그러면서 “에티오피아에 돈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하는 환자들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공부를 썩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물 과목은 반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관심이 많다고 한다.
아스나카치 양은 요즘 고민이 많다.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한 달 전 직장을 잃었기 때문이다. 학용품을 챙기기도 버거워졌다. 생물 시간에 꼭 필요한 준비물을 사기 위해 돈을 달라고 부모님께 말할까 몇 번이나 망설이다 그냥 학교로 간 적도 많다고 했다. 언니와 오빠의 학비를 대기도 어려운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케타초 몰라 씨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한숨만 쉴 뿐이었다. “세 아이의 학비만 한 달에 500비르(약 5만 원)가 들어가는데 그것을 마련하기도 어렵습니다. 자동차 고치는 기술은 누구보다 자신 있는데 일하고 싶어도 써주는 곳이 없어요.”
할아버지 몰라 씨가 1974년 사회주의 세력의 쿠데타로 강제 예편되면서 크게 기운 집안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보훈처가 매달 300비르(약 3만 원)를 지급할 것이라고 알려주자 케타초 씨는 “다음 달부터 아이들의 학비 걱정이 컸는데 한숨 돌렸다”며 기뻐했다. 300비르는 이곳 일용노동자들의 한 달 치 봉급에 해당한다.
아스나카치 양은 “공책과 책가방을 살 것”이라며 ‘핑크색 책가방’을 마련할 꿈에 부풀었다. 그동안 책가방을 살 수 없어 어머니한테 물려받아 써온 검은 배낭은 교과서 공책 필기도구 등이 뒤엉켜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보훈처는 올해 초부터 6·25전쟁 참전 16개국 참전용사들의 후손을 돕기 위해 ‘우수리’ 모금 사업을 벌여왔다. 보훈처를 비롯해 청와대 국방부 행정안전부 교육과학기술부 등 41개 부처 공무원 9만4000여 명의 월급에서 1000원 미만의 돈(우수리)을 떼어 차곡차곡 모았다. 그렇게 모은 것이 현재 1억5000만 원이 됐다.
보훈처 제대군인정책과 김상출 사무관은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분들인데 지금 와서 보답하려고 보니 남아 계신 분은 몇 명 안 돼 차라리 후손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고 생각했다”고 모금운동의 취지를 설명했다. 김 사무관은 “점점 호응이 높아져 연말까지는 4억 원을 모금할 것”이라며 정전협정 체결 60주년인 2013년까지 사업을 지속하는 한편 필리핀 태국 콜롬비아까지 이 사업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17일 장학금을 전달받은 아스나카치 양은 행사가 끝나자 수줍게 웃으며 기자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고는 한국 사람들에게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어 작문이 서투르다며 암하릭어(에티오피아 전통언어)로 쓰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6·25전쟁은 잘 모르지만 저를 이렇게 도와주신 한국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 훌륭한 의사가 되어 한국을 방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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