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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6월 3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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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평북 정주 오산 땅 작은 농원 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종고조부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이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을 위해 옳게 살아야 한다”고 외친 훈육을 어린 그는 바로 알아들었습니다. 가친(이찬갑·李贊甲)은 “그 나라의 말과 역사가 아니고는 그 민족을 깨우칠 수 없다”는 덴마크인 그룬트비히의 명언을 들려주었습니다.
오산학교에서 민족을 익힌 뒤, 앞으로 쓸 도구를 마련하고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와세다대로 갔습니다. 거기서 군국주의 일본제국 정부에 의해 대학에서 축출된 두 학자를 눈여겨봤습니다. 역사학자 쓰다 쇼키치(津田左右吉)와 경제학자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두 양심으로부터 선생은 학문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학문적 진리를 거역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는 야나이하라의 말을 선생은 얼마 전까지도 되뇌었습니다. 선생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곧 민족을 정말 사랑하는 것이란 신념을 그와의 접촉을 통해 갖게 된 것이라고 술회했습니다. 보편성에 대한 신념도 그로부터 배운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일제의 포악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 여느 조선청년들처럼 그도 군대에 끌려가 7개월간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광복 후 서울대에서 이병도, 손진태 등의 가르침으로 이 나라 역사학을 직접 끌어나갈 채비를 했습니다. 20대 말 젊은 나이에 ‘역사학회’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패전으로 귀국한 일본의 조선학 학자들이 ‘조선학회’를 결성한다는 소문이 젊은 역사학도들을 자극했습니다. 전쟁 중인데도 ‘역사학보’란 잡지를 기적처럼 발행했습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이 땅에 1960년대부터 민족의 역사를 찾는 한국학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주 참신한 개설서 ‘한국사신론(韓國史新論)’을 네 번이나 고쳐 쓰는 정열로 그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한국민은 엽전의식이란 열등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라고 판단하고, 이를 깨뜨리지 않으면 민족의 장래를 기약하기 힘들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20권의 저서, 11권의 편저·역서, 160여 편의 논문, 30편의 서평과 논문평 등으로 그 잔재를 없애고 민족사를 바로 세우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 고투 중 40대 말에 얻은 병으로 끝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세상은 유감스럽게도 60년대 이후 이 나라의 부흥에 이런 역사학자들의 고투가 있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부음을 듣고 급히 달려간 빈소에 선생께서 흰 ‘조선옷’ 입고 저를 맞이하십니다. 영정 속의 선생님이 제 눈시울에 아른거려 한없이 슬픕니다. 영생하옵소서.
이태진 서울대 교수·역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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