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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월 25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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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가 김 교수의 소설에서 오류라고 지적한 부분은 크게 세 가지.
첫째, 김 교수는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이 이순신의 옥포해전이 아니라 임진년(1592) 4월14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왜군 30여척을 격침시킨 것이라고 서술했으나 이날 왜군과의 전투는 없었다는 것.
둘째, 김 교수는 임진년 4월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이 경상우수영 소속인 남해현의 곡식 창고와 무기 창고에 불을 지르고는 왜군의 방화로 위장했다고 묘사했으나 이는 터무니없는 모함이라는 것.
셋째, 김 교수는 이순신이 정유년(1597)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어명을 어기고 부산 앞바다에 진격하지 않아 체포됐다고 했으나 이순신은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재반박 글에서 “이 작품이 원균을 높이기 위해 이순신을 폄훼했다는 송우혜 선생의 지적은 사실이 아니며, 나는 지금도 이순신이 구국의 명장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밝혔다.
송씨의 지적에 대한 김 교수의 반론을 싣는다.》
전쟁이 시작된 임진년 4월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군은 과연 어떻게 움직였을까.
김간의 ‘원균행장기(元均行狀記)’에 나오는 “적선 십여 척을 불사르고 노획하였다”는 언급이나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 5월1일 조(條)에 실린 “경상우수사가 왜적을 많이 잡아 승세를 크게 떨치고 있다”는 남원부사 윤안성의 기록, 원균의 명을 받아 이순신에게 거듭 원병을 청했던 이영남의 일생을 정리한 ‘이영남장군전기(李英男將軍傳記)’ 등을 참조할 만하다.
송우혜 선생은 원균이 이끄는 경상우수군이 전투 없이 자멸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위 사료들을 바탕으로 원균이 일종의 게릴라전을 폈다고 보았다. 다만 4월14일에 전투를 설정한 것은 흥미를 극대화하려는 소설적 장치였고, 현재 집필중인 개정판에서는 이를 며칠 뒤로 옮겼다.
남해현 방화 사건은 더욱 간명하다. 전라좌수군이 현에 도착하니 현령과 첨사까지 ‘도망’갔기에 창고를 불태우고 후퇴했다는 것이 이순신의 입장이다. 그러나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은 ‘선조실록’ 25년 6월28일 조의 장계(狀啓)에서 상반된 소식을 전한다. 남해현령 기효근이 도망간 것이 아니라 잠시 바다로 나간 사이 전라좌수군이 창고를 불태우는 바람에 “보리를 거두어 군량을 마련해” 어렵게 성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송 선생은 ‘선조실록’에 실린 김성일의 장계(狀啓)도 살폈을 듯한데 이순신의 입장만이 사실이라고 단정한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의 삭탈관직 이유 역시 송 선생과 해석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듯하다. 송 선생의 주장대로 1597년 2월10일 이순신이 부산 앞바다에 갔지만, 이순신에 대한 문책은 같은 해 1월27일 어전회의에서 거의 결정됐다. 5년간 되풀이해서 내린 “부산으로 진격하라”는 선조의 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2월6일 선조는 선전관을 시켜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명했으며, 2월10일 이순신의 한 발 늦은 출정도 이 어명을 바꾸지는 못했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원균, 이억기, 권준, 우치적 등 뛰어난 장수들이 모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전라좌수군만의 승리도, 경상우수군만의 승리도 아닌 조선수군 전체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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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화해와 희망이 필요한 때다. 20대 중반에 쓴 졸작의 미숙한 부분에 대한 송 선생의 지적을 고맙게 받아들이며 5월에 개작 발표할 ‘불멸’을 통해 나머지 답을 대신할까 한다.
김탁환 한남대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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