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 아내 받치며 사투35분…전남 구례 손일용씨

  • 입력 1998년 8월 3일 19시 24분


거센 장대비가 휩쓸고 간 자리에 아픔만 남은 것은 아니다.

감나무에 올라 ‘물벼락’을 버티며 애틋한 부부애를 확인한 노부부의 정겨운 사랑 이야기도 있다.

마을앞 다리가 폭삭 무너질 정도로 거센 물살이 훑고간 전남 구례군 토지면 구산리 도랑옆 낮은 집에 사는 손일용(孫一龍·68)할아버지.

손씨가 빗소리에서 이상한 예감을 느낀 것은 지난달 31일 밤 11시경. TV를 보다 잠든 부인 김두례(61)씨가 깰까봐 조심스럽게 집 밖 도랑을 오르내리며 살폈지만 불어난 물의 양이 대수롭지 않아 마음을 놓고 방에 들어왔다. 그러나 손씨가 잠자리에 들려고 겉옷을 막 벗는 순간, 부인 김씨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난데없이 뒷마당에서 돌담이 무너지고 집 벽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었죠. 이미 앞마당에 무릎까지 황토물이 가득 찼더라구요.”

놀란 김씨가 멍하니 서 있을 때, 어깨너머로 사태를 직감한 손씨가 황급히 외쳤다.

“빨리 감나무로 뛰어.”

마당 오른편 장독대와 우물가는 이미 거센 물살에 잠겼고 보이는 것은 5m 높이의 감나무뿐이었다.

속옷차림의 손씨는 뒤뚱대는 부인의 등을 떼밀어 감나무 위로 겨우 밀어올렸다. 순간, 손씨의 몸이 휘청했다. 대문 밖에서 밀려온 미루나무 덩이가 손씨의 가슴팍을 때렸고 연이어 쪼개진 블록담이 물살 속에서 다리를 쳤다. 35분간 피를 흘리며 벌인 물과 나무와 돌멩이와의 싸움. 그러나 손씨는 머리로 김씨를 떠받치며 악착같이 나무를 감싸안고 버텼다.

3일 오후 팔과 다리 가슴 곳곳에 동여맨 붕대를 매만지던 손씨는 긴박한 순간을 꿈결처럼 더듬었다.

“내 한 몸이야 지금 당장 어떻게 돼도 상관없지만 이제껏 고생만 시킨 마누라를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개울에서 빨래한 이불호청과 옷가지를 이고 대문을 들어서는 김씨. 긁힌 상처 하나없이 얼굴엔 환한 웃음이 가득하다.“맨날 서로 시무룩하니 무심하게 살지만 찡한 정이야 어디 가겠어요. ‘살았으니 됐다’는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는데 아직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했네요.”

〈김경달기자〉dal@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