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켈로」용사들,팔미도 등대와 『감격의 만남』

  • 입력 1997년 9월 19일 20시 11분


15일은 한국전쟁(6.25)의 흐름을 바꿨던 인천상륙작전 47주년 기념일. 당시 이 작전에 투입됐던 켈로(KLO)부대원 중 생존자 26명이 20일 격전지였던 인천앞바다 팔미도 등대를 찾는다. 켈로 8240부대 전우회 최규봉(崔奎峯·75)회장과 손진(孫塡·대한민국건국회회장) 문봉재씨(실향민 중앙회회장) 등은 해군의 허락을 받아 20일 오전 생명을 걸었던 격전지를 찾기로 했다. 최씨는 닷새간의 격전 끝에 팔미도 등대를 탈환,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의 횃불을 밝힌 증인. 50년 8월10일 당시 켈로부대 고트부대장으로 대구에서 방어전을 펴고있던 28세의 청년 최씨에게 「부산에서 백구호를 타라」는 극비명령이 하달됐다. 켈로부대는 미 극동사령부 「주한 연락처」(Korean Liaison Officer)의 약칭인 비밀부대.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해방 직후부터 이 부대에 몸담았던 최씨는 덕적도에 도착해서야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알게 됐다. 하루에도 몇 미터씩 높낮이가 바뀌는 인천항의 수심과 복잡한 섬사이의 정확한 해도를 그리기 한 달여만인 50년 9월10일 그에게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소음총으로 무장한 25명은 그날밤 북한군을 사살하고 등대를 확보했으나 그 뒤 5일 동안 등대를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D―1일인 14일 저녁7시. 「15일 0시를 기해 등대불을 켜라」는 최후 명령에 따라 최씨 일행은 등대 탈환작전에 나서 약속 시간보다 1시간40분 늦은 15일 오전2시20분 등대불을 밝혔다. 이를 신호로 7개국 연합함대 2백61척이 인천항을 향해 밀려들었다. 최씨는 『아직도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켈로부대원 3천여명의 명단을 전쟁기념관 벽에 새기는 데 여생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02―273―8746 〈인천〓박정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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