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언 소설가시간이란 워낙 광포해서 모든 걸 바꿔 놓는다. 서울 은평구청 앞에는 1967년에 문을 연 ‘도원극장’이라는 영화관이 있었다. 대기업의 멀티플렉스관이 등장하기 전까지 구민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던 곳으로, 서울에서 마지막까지 간판공이 손으로 그린 광고를 내걸던 극장이다. 그런데 영업난으로 2007년 기어이 문을 닫았다. ‘녹번꼼장어’는 도원극장 건물 바로 옆에 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이 자연스레 자리를 옮겨 소주잔 기울이던 곳인데, 극장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연탄불 지피며 고전영화 같은 서사를 이어가고 있다.
녹번꼼장어는 해가 질 즈음이면 가게 앞 연탄 화덕에 불이 달아오르고 연기가 천천히 번지면서 사람들 말소리가 조근조근 쌓이는 곳이다. 이 집의 가장 큰 미덕은 모든 걸 삼켜버리는 시간을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사실 꼼장어(곰장어)라는 재료는 결코 녹록지 않다. 손질이 까다로운 데다 불 앞에서의 집중력도 요구된다. 이 집은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화덕 위에서 골고루 익혀진 꼼장어가 은박 포일 위에 올려지면 불향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소금구이는 재료의 결을 숨기지 않고 양념구이는 과하지 않게 입맛을 붙든다.
1인분에 1만4000원인 꼼장어구이는 소금을 치든, 양념을 바르든 원재료의 본색을 잃지 않는다. 꼼장어만의 졸깃하면서도 고소한 식감이 언제든 한결같다. 인상적인 것은 기름소금장과 함께 제공되는 참깨드레싱이다. 깻잎에 꼼장어 한 점 올리고 대파김치 한 쪽을 마늘과 함께 곁들인 후 참깨드레싱을 살짝 얹어 입에 넣으면 그 절묘한 맛이 비할 데 없는데, 비위가 약한 여성이나 MZ세대 손님도 환호성을 올린다.
사이드 메뉴도 죄다 정겹고 맛있다. 시원한 콩나물국은 무한 제공되고 어묵탕, 계란말이, 날치알주먹밥 같은 친근한 ‘곁들임’ 안주를 착한 가격에 손님에게 내어준다. 꼼장어라는 주연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술자리에 흥을 더하는 조연들인 셈이다. 단골들은 꼼장어 한 점과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 일상의 시름을 놓아버린다. 꼼장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귀한 생선이 아니어서 내다 팔지도 못한 어민들이 노동을 마치고 집 부뚜막에서 구워 먹던 음식. 서민에겐 혹독한 계절일 수 있는 겨울, 불 위에서 구워지는 꼼장어는 음식 이상의 위안을 선사한다.
녹번꼼장어가 지역민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아 온 이유도 이윤이나 유행을 좇지 않는 무심함과 소탈함에 있다. 그저 술 한 잔 기울이며 오래 앉아 있어도 좋을 안식을 제공해왔다. 연조가 근 50년을 헤아리는 노포여서 털털하면서도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가게를 가득 채우지만 특별히 누군가를 추켜세우지도, 어느 한 사람을 소외시키지도 않는다. 이 집에 오는 손님들은 껍질을 벗고 생살로 불판에 올려진 꼼장어처럼 절대적으로 평등할 뿐이다. 그 한결같음이 꼼장어처럼 담백해서 믿음이 가는 것일까.
녹번꼼장어는 단골들에겐 명소라기보다 생활의 일부다. 퇴근 후 허기를 채워야 할 때, 오래된 친구를 만날 때, 혹은 지친 하루를 마감할 때 이 집은 늘 같은 자리에서 불을 피우고 당신을 기다린다. 이를테면 세월을 훌쩍 뛰어넘으며 재음미되는 옛날 영화나 고전음악 같은 곳이다. 내게 ‘녹턴’은 ‘녹번꼼장어집으로 유턴하라’는 뜻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