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 OK, 신기록만 다오” 스포츠 판도라의 상자[유상건의 라커룸 안과 밖]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17일 23시 10분


사진 출처 Enhanced Games 홈페이지
사진 출처 Enhanced Games 홈페이지

유상건 상명대 스포츠ICT융합학과 교수
유상건 상명대 스포츠ICT융합학과 교수
물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동작으로 헤엄쳐 100m를 가는 경기가 있다고 치자. 출전 선수 모두가 5kg의 추를 달고 물속에 뛰어든다면 이를 ‘공평한’ 스포츠라 할 수 있을까. 경쟁을 더 흥미롭게 하기 위해 몸무게에 따라 1∼5kg까지 무게를 달리해 부과한다면 이는 훨씬 ‘공정한’ 경쟁일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약물로 능력을 ‘향상’시키거나 극도로 힘을 ‘강화’시켜 경쟁한다면 이를 여전히 스포츠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그저 볼거리로 치부해야 할까.

2026년 5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인핸스드 게임(Enhanced Games·강화 경기)’이 열린다. 출전 선수는 경기력 향상을 위해 약물은 물론이고 최신 기술로 기능이 향상된 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 종목은 육상(육상 100m, 허들 100·110m), 수영(자유형 50·100m , 접영 50·100m), 역도 등이다. 종목당 상금 25만 달러(약 3억6000만 원)에 세계기록을 경신하면 100만 달러가 제공된다. “우승하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3년간 벌 만한 금액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규정을 준수하는 선수도 참가할 수 있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프랑스 등에서 출전하기로 했고 그중에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있다.

벤처캐피털리스트들로 구성된 대회 투자자들이 개설한 홈페이지를 보니 ‘엘리트 스포츠의 새 시대’를 선포하며 ‘과학으로 스포츠를 재탄생시킨다’고 주장한다. 황당해 보이지만 이 계획이 뜬금없는 건 아니다.

식품·스포츠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델라웨어 노스’가 2015년에 발간한 ‘스포츠의 미래’ 보고서는 이보다 더 극심한 경쟁을 예측했다. 이 보고서는 미래 스포츠를 경기장, 중계, 스폰서십, 팀과 리그, 팬, 티케팅 등으로 나눠 전망했는데, 선수 항목에는 놀라운 예측이 많다. 부상 선수가 피부 세포를 줄기세포로 전환한 뒤 천연 콜라겐에 분사해 여러 기관을 재생, 이식하는 것은 기본이다. 적혈구 수를 늘려 산소 공급량을 높이고, 피로 물질인 젖산이 생성되지 않도록 해 최고 속도로 60%나 더 오래 달릴 수도 있다. 특수 콘택트렌즈의 도움으로 타율이 좋아진 타자는 이미 많다. 유전자 검사로 운동선수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아이들만 선별하고, 마침내 인간은 로봇과 겨루게 된다. 1만 시간의 노력보다 한 알의 약이 위대한 선수를 만드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인간 능력의 극대치를 추구하는 것은 오랜 인간의 욕망이다. 또 최고의 경쟁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심리다. 그러나 모두에게 약물을 허용한다고 해서 경쟁이 공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더 효과가 좋고 안전한, 고로 더 비싼 약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핸스드 게임’이 자칫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은 아닐까. 스포츠의 본질과 공정성, 정직성이라는 가치 위에 경쟁과 쾌락, 돈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놓인 모습 말이다. 2026년, 우리는 ‘새로운 스포츠’를 보는 것이 아니라 스포츠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를 시험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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