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림은 가슴을 뛰게 하고 멋지게 보이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목숨을 걸고 싸운 동서고금의 전쟁사에서 여러 차례 입증된 사실이다. 군대의 역량 범위 내에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규모와 확보할 수 있는 장비, 탄약, 연료, 식량 등을 고려해 작전 계획을 짜야 승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기 쉽다.
그림을 너무 크게 그려서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가 임진왜란이다. 16세기 말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한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자기 뜻을 알렸다. 도요토미 군대가 중국 광둥이나 산둥으로 직접 상륙하지 않고 한반도에 우회 상륙한 이유는 목표를 조선으로 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을 먼저 복속한 후 명나라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도요토미는 조선의 왕에게 보낸 국서에도 ‘정명향도 가도입명(征明嚮導 假道入明)’이라고 썼다. 조선이 일본의 부하가 돼 일본군 앞에 서서 중국으로 인도하라는 것이다. 도요토미는 한양을 점령한 후 중국을 정복해 천황을 베이징에 모시고 인도 정복에 착수한다는 비전까지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의 국력에 비해 너무 큰 그림이었다. 도요토미 자신도 어느 정도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명 정벌을 위해선 조선의 조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깝다는 현실을 간과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는 일본 열도를 한 수 아래라고 인식하는 우월의식이 존재했고, 건국 후 200년간 명나라의 제후국이라는 국제질서에 순응했다. 조선군의 전투력도 수준급이어서 일본군이 쉽게 요리하기 어려웠다. 조선 육군은 비격진천뢰, 화차, 신기전 같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명품 화약 무기로 무장돼 있었다. 이순신 제독이 이끄는 조선 함대는 우수한 함포와 세계 최초의 철갑돌격선인 거북선을 운용해 세계 최고 수준의 해상 전투력을 자랑했다. 개전 초기 일본군의 빠른 진격이 위협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이 지나 조선군이 체계를 갖춘 이후엔 국면이 달라졌다.
실제로 조선군이 체계를 갖춘 이후 첫 번째로 치른 전투인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이 이끄는 3000명의 조선군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10배가 넘는 3만 명의 일본군을 격파했다. 조선의 지형은 산악지대가 대부분이고 도로망도 빈약해서 진격하는 일본 육군에게 필요한 식량, 무기, 탄약을 육로로 공급하기 어려웠다. 부산에서 남해를 거쳐 서해로 북상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었지만 조선 해군에 가로막혀 있었다. 일본군의 실력으로는 조선군을 상대하기도 버거운 것이 현실이었다. 여기에 명나라 군대까지 한반도에 전진 배치됐다. 시작부터 현실성이 크게 부족했던 도요토미의 큰 그림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단계적인 접근과 현실적인 판단으로 독일통일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달성했다. 19세기 독일은 수많은 소국으로 쪼개져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그중 돋보이는 군사강국이었다. 둘 중에선 오스트리아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우월감을 갖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독일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 이웃 나라 프랑스 역시 프로이센의 힘이 더 강해지면 자신들의 안위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해 견제하고 있었다.
1866년 비스마르크는 우선 오스트리아를 제압해 첫 번째 장애물을 제거했다. 1870년에는 프랑스의 선제공격을 유도해 국제 여론이 프로이센에 우호적으로 돌아가게 하고 프랑스를 완벽히 제압했다. 가장 큰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오히려 숨을 골랐다.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는 것에 대해 유럽 국가들은 경계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한때 유럽 최고의 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인이었다.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 휘하에 들어간다면 새로운 강대국이 출현하는 셈이었다. 러시아, 영국 등 다른 유럽 강국들로선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를 통합하는 대독일 통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는 소독일 통일 중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그 결과 독일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만일 지나치게 큰 그림을 그렸다면 러시아와 영국의 개입으로 일을 그르쳤을지 모른다. 비스마르크는 현실적인 꿈, 서두르지 않고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끈기,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계산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가 꾼 통일의 꿈은 작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컸다. 아메리카 인디언식의 표현을 쓰면 ‘리틀 빅 드림(Little Big Dream)’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기사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418호(2025년 6월 1호)에 실린 ‘도요토미의 실패 vs 비스마르크의 성공’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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