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간 인간의 삶은 종이와 함께했다. 출생신고는 물론이고 입학, 결혼, 입사, 병원 등 우리 삶은 언제나 종이와 함께였다. 이렇게 영원할 것 같은 종이는 최근 디지털화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인간은 언제부터 종이를 사용했고, 앞으로 종이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고고학이 전하는 종이의 기원과 그 미래를 살펴보자.
포장지에서 시작된 종이
종이의 기원과 관련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 적지 않다. 종이의 영어 명칭 ‘페이퍼(paper)’는 이집트의 갈대속 식물인 ‘파피루스’에서 기원했다. 외형상 비슷하지만, 파피루스는 초본류의 식물을 둘로 쪼개서 붙인 것인 반면 종이는 목재의 구성 성분인 셀룰로오스를 끓여서 가공한 것이라 아예 다르다. 얇고 평평한 기록매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연상작용을 일으켰을 뿐이다.
한나라의 환관 채륜이 서기 105년에 종이를 처음 만들었다는 옛 사서 기록도 최근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종이가 그보다 수백 년 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고학 발굴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채륜 이전에 만든 종이는 주로 실크로드와 그 인접 지역에서 10건 이상 출토됐다. 채륜은 그 전부터 있었던 종이를 글씨 쓰기 편하게 개량했던 수많은 인물 중 하나였다. 다만 당나라 이후 문(文)을 숭상하는 문화가 정착되면서 채륜의 역할이 강조됐을 뿐이다.
채륜 이전의 종이는 주로 닥나무가 아니라 대마(麻)가 주성분이었고, 그 위에 글자가 씌어진 것은 3분의 1이 채 되지 않는다.
중국 신장 투루판의 당나라 시절 점토 인형. 관청에서 버린 행정문서를 활용해 인형의 팔을 만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대부분의 초기 종이는 나무로 만든 말 인형이나 동전, 청동거울과 함께 발견됐다. 1978년 중국 산시성에서 발견된 한나라 때 묻은 항아리에서는 동전꾸러미 사이에 종이꾸러미가 있었다. 소위 ‘뽁뽁이’라 불리는 에어캡이나 충전재로 사용한 것이 종이의 기원인 셈이다. 초기의 종이는 세지법(洗紙法)이라고 하여 나무 틀에 섬유를 끓인 물을 붓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는 지금의 신문지보다 더 두껍고 표면도 거칠어 글씨 쓰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종이의 기원을 더 멀리 본다면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뿌리를 가공해 먹는 등 다양하게 나무를 활용하던 신석기시대로도 볼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6000년 전 중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이 나무의 섬유를 뽑아낸 뭉치를 발견하기도 했다. 지금도 네팔이나 인도네시아 등 옛 풍습이 잘 남아 있는 지역에서는 나무의 펄프를 으깨어 종이를 뜨는 원시적인 방법이 남아 있다. 즉, 종이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지혜로 조금씩 개량되며 진화해 온 셈이다.
종이가 본격적으로 책의 재료로 도입된 것은 중국 한나라대다. 이때부터 대마 대신에 닥나무 등 여러 재료를 섞고 재료를 물속에서 흔들어 섬유조직이 고르게 얽히도록 하는 초지법(抄紙法)이 도입됐다. 채륜의 고사는 이때 이뤄진 기술적인 발전을 상징하니, 수천 년 이어온 종이의 역사는 그 위에 글씨를 쓸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이다.
기술의 집약체, 한지
한국의 가장 오래된 종이 인쇄매체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국립문화유산청 제공한국에서 실물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종이는 서기 8세기에 만들어진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역사가 많이 늦은 편이다. 하지만 서기 1세기 때 만들어진 창원 다호리의 무덤에서 붓이 발견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자는 더 일찍 도입됐고, 종이의 사용도 더 빨랐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다만 유기물질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한국의 토양 특성상 직접적인 증거는 찾기 어렵다.
닥나무를 이용한 한지는 매우 튼튼해서 다른 나라의 종이와 크게 차별화됐다. 닥나무 반죽과 닥풀이 섞인 액체를 미세한 구멍이 난 넓은 뜰채로 여러 번 뜨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위아래, 좌우로 번갈아 뜨면서 섬유구조가 서로 얽히게 해 아주 질기게 만들었고, 알칼리성의 잿물을 섞어 쉽게 산화되지도 않았다.
한국의 종이는 생필품으로서 우리의 삶과 함께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방바닥은 장판지라는 노란 종이를 깔았다. 또 종이로 옷과 인형, 나아가 가구까지 만들었다. 전쟁을 할 때는 벌판에서 유둔지(油芚紙)라는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든 천막을 만들었다. 적의 조총이나 화살을 막는 갑옷도 종이로 만들었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죽어서도 종이와 함께했다. 미라가 잘 발견되는 조선시대의 회곽묘를 발굴하면 관의 밑 시상(屍牀)이나 명정에 두껍게 한지를 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야말로 조선시대 우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종이와 함께한 것이다. 세계 어디를 봐도 이렇게 종이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없으니, 비록 기원지는 아니지만 ‘종이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수한 한지의 전통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고구려의 종이인 만지(蠻紙)가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 부대에 포함돼 있던 제지 기술자가 사마르칸트에 고급 제지술을 전했는데, 이때 전해진 종이 기술이 고구려의 만지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마르칸트에 전해진 고급 제지술은 아랍권에 확산돼 출판문화를 비약적으로 진보시켜 아랍권의 문명 창달에 크게 기여했다.
문화재로 신분 상승한 폐지
창덕궁 벽에서 발견된 초배지. 낙방한 과거시험 답안지를 재활용했다. 강인욱 교수 제공
시신의 깔개로 쓰인 종이와 돗자리. 당나라 시절 투루판의 한 무덤에서 발견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고고학 발굴에서 종이가 발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자연상태에서 조금만 세월이 지나도 쉽게 바스러지고 사라진다. 또 다른 이유로는 폐지도 알뜰하게 재활용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물자가 귀했던 과거에 폐지는 쓸모가 많았다. 아궁이의 불쏘시개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전통가옥에 벽지로 창호지를 바르기도 했다. 또 나무 인형의 팔다리는 폐지를 꼬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재활용된 종이들이 발견되면 당시의 기록문화를 알려주기 때문에 황금유물 못지 않게 귀한 대접을 받는다. 창덕궁 수리 과정에서는 벽 장판 안쪽에 바른 낙방한 과거 시험 답안지가 발견돼 현재 공예박물관에서 궁정의 화려한 유물 사이에서 당당히 전시되고 있다. 또 몇 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당나라 시기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투루판에서 발굴된 관 바닥의 돗자리를 위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관의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덮개처럼 폐기된 행정 문서를 깐 것이었다. 그 폐지의 내용은 당시 당나라가 실크로드를 다스리는 과정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였기에 세계적으로도 널리 관심을 받고 전시회까지 열렸다.
당신이 남긴 메모지나 시험지도 우연히 장롱 밑에 묻혀 있다 수 천 년 뒤에 발견된다면 수많은 역사가들의 사랑을 받고 교과서에도 등장할지 모른다.
디지털 시대, 종이의 존재 이유
지난 2000년간 우리와 함께했던 종이의 운명도 최근 급변하고 있다. 종이를 대체하는 합성섬유 포장재가 넘쳐나고 디지털 사회가 빨라지면서 각 학교와 기관들은 ‘페이퍼리스(paperless)’를 선언하고 있다. 심지어 대학 도서관들은 석박사 학위 논문마저 온라인으로 수령하기 시작했다.
종이가 필요 없는 시대라고 하지만 과연 현재의 디지털 매체가 몇백 년 뒤에도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다. 처음 컴퓨터를 사용했던 때에 사용했던 플로피디스크는 저장버튼의 아이콘으로만 남아 있고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매체는 거의 사라졌다. 나의 대학 시절 기억은 오로지 종이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지난 30년 사이 자료는 CD와 USB를 거쳐 지금은 클라우드에 담아두고 있다. 몇백 년 또는 몇천 년 뒤 현대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어 우리가 알고 있는 매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망각된 뒤라면 지금의 자료를 제대로 읽어 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전히 대학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들이 디지털화에 박차를 가하며 종이책의 비중을 줄이지만 종이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이 오감으로 느끼고 손으로 글을 쓰는 능력이 계속되는 한 종이도 함께 진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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