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개봉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SF 영화 ‘터미네이터’에는 휴머노이드 로봇 ‘T-800’이 나온다. 보디빌더 출신 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터미네이터의 피지컬(Physical)은 거의 완벽해 보였다. 근육질 몸매에 가죽재킷을 입고 선글라스까지 쓴, 인간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로봇이라니. 인공지능(AI) 컴퓨터 ‘스카이넷’이 만든 T-800은 2029년 미래에서 날아온 모델이다.
머지않아 터미네이터와 같은 수준의 피지컬 능력으로 무장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마주할지도 모르겠다. 무섭도록 파괴적인 AI 혁신이 디지털에서 피지컬 영역으로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5’ 기조연설에서 “로봇의 챗GPT 모먼트가 다가오고 있다”며 ‘피지컬 AI’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피지컬 AI는 물리적인 세계를 인식하고 자율적으로 판단해 실제 환경에서 활용되는 AI 기술로 휴머노이드 로봇이나 자율주행차와 같은 실물 하드웨어에 탑재된다. 인간과 비슷한 모습만 갖췄을 뿐 걷기나 제한적인 작업만 가능했던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피지컬 AI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면서 데이터를 생성·축적하고 학습해 스스로 진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휴머노이드 로봇들은 이미 각종 산업 현장에 침투해 있다. 특히 테슬라와 BMW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자동차 부품 선택과 운반, 검사에 이르는 생산 라인에 휴머노이드 로봇을 투입했다. 지난해 5월 자체 개발한 ‘옵티머스’ 2대를 공장에 시범 투입했던 테슬라는 올해 최대 1만 대를 생산하기로 했다. 또 매년 생산량을 10배로 늘려 내년에는 월 1만 대, 2027년에는 월 10만 대를 생산하는 것이 목표다. 당장 2년 후부터 수백만 대에 달하는 생산직 휴머노이드 로봇 군단이 노동시장을 점령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지난달 “옵티머스가 연간 100만 대 이상 생산되는 시점에 대당 제조 원가는 2만 달러(약 2900만 원) 이하로 낮아질 것”이라고 했다.
최근 저비용 AI 모델 ‘딥시크 쇼크’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긴 중국은 휴머노이드 상용화 부문에 있어서 만큼은 미국에 앞서 있다. 중국 로봇업체 유니트리가 내놓은 최신 모델 ‘G1’은 1만6000달러에 불과하지만 초속 2m로 달리고 용접이나 프라이팬 뒤집기 같은 고난도 작업도 할 수 있다. 지난달 중국중앙(CC)TV가 주최한 춘제 갈라쇼에서는 이전 모델인 ‘H1’ 16대가 무용수 16명과 합동 공연에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황 CEO가 지난달 CES 기조연설에서 공개한 14개 파트너사의 휴머노이드 로봇 가운데 6개가 ‘메이드 인 차이나’였다. 미국이 만든 건 4개뿐이었다. 지난해 중국에서 발표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53억 위안(약 1조 원)인 중국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 규모가 2029년에는 15배 수준인 750억 위안 규모로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년 뒤 중국의 휴머노이드 군단이 가장 먼저 취업할 곳은 한국이 될지도 모른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화가 이뤄졌지만 급속한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노동력 부족이 어느 곳보다 심각한 탓이다. 그때 우리가 만든 로봇과 기술은 중국산 휴머노이드의 침공을 방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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