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이면 서울 목동, 신월 야구장에서는 고교야구 전반기 최강팀을 가리는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이 열린다. 청룡기, 대통령배, 봉황기로 이어지는 4대 고교야구 메이저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봄의 축제다. 제80회 대회가 열린 올해도 전국 57개 고교야구팀이 황금사자기 무대를 밟았다.
10년 전 처음 황금사자기를 취재했을 때 들었던 첫 느낌은 불편함이었다. 뒷모습만 봐도 누구인지 아는 프로선수들의 경기와 달리 처음 보는 고등학생들의 경기를 보려면 훨씬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선수들의 이름과 타순, 포지션, 등 번호를 연결시키는 것부터가 일이다. 얼굴과 포지션이 겨우 익숙해질 즈음 경기는 끝나고 서둘러 선수, 감독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 다음 경기는 이미 시작되어 있다.
대체로 기자들에게 이름이 빠르게 각인되는 선수들은 특출나게 활약하는 이들이다. 신문이나 온라인에 한 줄이라도 이름과 소감을 남길 수 있는 선수들은 승리에 직결되는 결정적인 활약을 한 이들에게 한정된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경기장을 떠난다.
하지만 이름도 성도 몰라도 잊을 수 없는 얼굴들이 생긴다. 세이프 될 가망이 없어 보이는 땅볼에도 1루에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했던 아무개, 몸에 공을 맞고도 적시타를 친 것처럼 1루로 전력 질주하던 아무개, 16강에서 패한 뒤 야구장 복도에서 팔뚝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훔치던 아무개, 결승전에서 1-10으로 뒤진 채 9회초를 시작하고도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더그아웃의 아무개들.
토너먼트 대회에서 내일을 기약하는 길은 오늘의 승리밖에 없다. 약팀일수록 매 경기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 토너먼트는 매 경기가 총력전이다. 이번 대회 결승에서도 양 팀은 에이스가 마운드를 밟지도 못했다. 충암고는 8강, 대전고는 4강 고비를 넘는 데 에이스 카드를 써야 했다.
그 말인즉슨 우리가 황금사자기에서 보는 대부분의 경기가 각 팀이 할 수 있는 전력을 다한 최선이었다는 뜻이다. 모래를 날려 가며 뛰어가는 아무개들의 몸은 ‘최선을 다한다’는 관념 속 말을 눈앞에서 보여 준다. 봄볕 아래 펼쳐지는 아무개들의 그 몸짓은 찬란하다. 대회 기간 내내 배달 음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관계자들이 출근 인사를 “오늘은 콜드게임으로 끝내자”고 하다가도 정작 콜드게임패 위기가 닥친 선수들을 향해 “한 점만 더 내라”며 응원하게 되는 이유다.
대전고 출신으로 한화 영구결번으로 은퇴한 정민철 MBC 해설위원은 황금사자기 결승을 앞둔 후배들에게 “성공의 잣대가 우승도 있지만 내 역량을 다 쏟아부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다. 몇십 년 후에 돌아봐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걸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며 “나 역시 고교 시절 가장 위력적인 공을 뿌렸을 때가 황금사자기였다. 당시 최강팀이었던 경남상고를 상대로 선발로 나가 삼진 14개를 잡았다. 지금도 그 얘기는 종종 한다”고 했다.
일본 농구 만화 슬램덩크에서 강백호의 북산고는 최강팀 산왕공고를 전국대회 2회전에서 만나 분투한다. 부상을 안고 경기를 이어 가다 쓰러진 강백호는 자신을 더 이상 뛰지 못하게 하는 노(老)감독을 향해 외친다. “영감님의 전성기는 언제였죠? 국가대표팀 시절인가요? 난 지금입니다!”
말 한번 섞지 못하고 더그아웃을 떠난 수많은 아무개들에게 뒤늦게나마 감사 인사를 전한다. 목동과 신월에서 보낸 2주의 봄, 그대들의 황금기를 지켜볼 수 있어 많이 설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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