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배를 하며 타인의 삶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2030세상/배윤슬]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7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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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바빠 통 연락 없이 지내던 친구가 도배를 부탁해 오는 일이 종종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오랜만에 친구 얼굴도 볼 겸 도배 작업을 맡아 진행한다. 친구나 지인의 부탁을 받아 일을 하다 보면 단순히 도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조금은 더 들어가게 되는 경험을 한다.

배윤슬 도배사·‘청년 도배사 이야기’ 저자
배윤슬 도배사·‘청년 도배사 이야기’ 저자
최근에 친구가 새로 문을 여는 학원의 도배를 맡아 진행했다. 작은 규모의 공부방으로 시작했는데 학생들이 많이 늘어나 확장 이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 만난 친구가 어느덧 학원 강사를 거쳐 한 학원의 원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각자 자기 일에 바빠 소식조차 나누지 못하는 동안 친구가 이루어 낸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강의실과 상담실 등 그 친구가 매일같이 출근해서 일하게 될 공간을 함께 만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친구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공부하게 될 곳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더 꼼꼼하게 작업하게 되었다.

또 한 번은 첫 신혼집에서 조금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옮기는 친구의 집을 도배했다. 결혼식에도 참석하고 신혼 집들이도 갔던 친구인데, 어느새 부부가 힘을 합해 더 나은 집으로 이사를 한다니 축하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친구 부부는 앞으로 이 집을 어떻게 꾸미고 또 그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생활을 해나갈지 상상해 보기도 하면서 친구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도배를 했다.

친구나 지인의 공간을 도배하다 보면 그들 삶의 모습이나 변화를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는데, 친구들 역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했을 것이다. 평소와 달리 도배 연장을 허리에 차고 작업 발판을 오르내리며 작업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친구 사이가 아닌 도배사와 소비자로 소통했으며, 그들은 도배사인 내가 작업해 놓은 결과물을 매일 마주하며 살게 될 것이다. 물론 친구들도 내가 도배사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떤 모습으로 일하는지 구체적으로는 몰랐을 텐데, 이것을 기회로 친구들 역시 내 삶에 조금 더 깊숙이 들어온 듯하다.

그동안 주로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도배하던 나는, 입주자와 직접 마주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도배한 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매일 출근해 일하게 될 직장, 누군가가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휴식을 취하게 될 안식처를 도배한다는 것은 아직 아무도 입주하지 않은 신축 아파트를 도배하는 것과는 또 다른 보람이었다.

바삐 살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없다. 아니 그런 노력을 할 여유가 없다. 당장 눈앞에 놓인 내 일, 내가 겪는 어려움이나 해결해야 할 과제들에만 집중하게 되고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도 표면적인 단계에서 그치게 마련이다. 다른 누군가의 삶에 관심을 가지거나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를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서로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나 역시 도배를 통해서나 혹은 다른 일을 통해서 누군가의 삶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려는 노력을 다시 시작해 본다.

배윤슬 도배사·‘청년 도배사 이야기’ 저자



#도배#청년#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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