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208시간 초과근무… 과로사 日의사 아들 가운 앞서 눈물 쏟은 母[글로벌 현장을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27일 2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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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과로로 세상을 떠난 의사 다카시마 신고 씨의 어머니 등 유족들이 14일 일본 도쿄 외신특파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어머니 준코 씨는 “과로로 세상을 떠나는 의사는 더 이상 나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극단적 과로로 세상을 떠난 의사 다카시마 신고 씨의 어머니 등 유족들이 14일 일본 도쿄 외신특파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어머니 준코 씨는 “과로로 세상을 떠나는 의사는 더 이상 나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
이상훈 도쿄 특파원
이상훈 도쿄 특파원
“의사였던 제 아들은 하루도 쉬지 못하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습니다. 끝내 극단적 선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과로로 세상을 떠나는 의사가 더 이상 나오면 안 됩니다.”

14일 일본 도쿄 외신특파원클럽 연단에는 주인을 잃은 하얀 의사 가운이 놓여 있었다. 지난해 5월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베시 고난(甲南) 의료센터 의사 다카시마 신고(高島晨伍) 씨가 생전에 입던 가운이었다. 어머니 준코(淳子) 씨는 기자들 앞에서 굵은 눈물을 쏟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생명을 구한다는 병원에서 의사들이 과로로 쓰러져 갑니다. 아들의 희생을 계기로 가혹한 일본 의료계 노동환경이 조금이나마 개선됐으면 합니다.”》



1년 7개월 전 젊은 의사의 안타까운 죽음이 일본 의료계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의료 인력의 과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엄마, 쉬고 싶어도 못 쉬어요”
오사카에서 태어난 다카시마 씨는 국립 고베대 의대를 졸업한 뒤 고난 의료센터에서 의사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연수 과정을 마치고 소화기내과 전공의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전공의 1년 차 때 그는 병원 소식지에 “아직 모르는 게 많지만 조금씩 할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있다.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고 썼다. 겸손하면서 배우려는 열정이 강한 의사였다.

다카시마 씨는 의사인 아버지와 형을 이어 훌륭한 의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전공의가 되면서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전공의가 되기 2개월 전부터 병원 측은 그에게 전공의 업무를 시켰다. 이제 갓 투입된 신입이었지만 선배와 같은 업무량이 할당됐다.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돌아오는 건 선배들의 꾸지람이었다.

“나 때는 하루 20시간씩 일했어. 이 정도도 못 견뎌서 어떻게 의사를 하겠다는 거야?”

“예전에는 1년에 5일밖에 못 쉬었어. 쉬고 싶다는 말이 나와?”

실수할 때마다 선배들은 욕설과 폭언을 퍼부었다. 좋아하던 한신 타이거스 프로야구 경기를 보는 건 꿈도 못 꿨다. 어쩌다 집에 가서 예능 프로그램을 봐도 얼굴에 웃음기가 돌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 준코 씨는 아들이 걱정돼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아들은 “나도 알지만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2022년 5월 17일, 준코 씨 휴대전화에 아들의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이제 어머니를 깨우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아들은 전날 “학회 발표 준비를 제대로 못 해 머리가 어지럽다”며 울음을 터뜨렸던 터라 준코 씨는 불안한 마음에 아들에게 몇 번이나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이 없었다.

준코 씨는 그 길로 차를 몰고 아들 집에 갔다. 캄캄한 방에서 아들은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준코 씨는 아들에게 체온이 남아있는 걸 확인하고 심장 마사지를 했지만 멈춘 맥박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망 전 한 달 208시간 초과근무
이 사건으로 일본 노동감독청은 다카시마 씨가 일했던 병원에 대한 실태 점검에 나섰다. 감독청은 올 6월 그의 죽음을 장시간 근로에 따른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조사 결과 다카시마 씨의 근무 일정은 살인적이었다. 지난해 2월 7일부터 사망한 5월 17일까지 100일 넘게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오전 7시 출근∼오후 11시 퇴근이 기본이었고, 다음 날 오후까지 33시간 이상 근무하는 날도 한 달에 몇 번씩 있었다. 학회 발표 준비, 논문 작성 등은 이른바 ‘자기(自己) 연수’로 처리돼 근로 시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감독청에 따르면 사망 1개월 전 그의 초과근무 시간은 한 달간 207시간 50분에 달했다. 일본에선 과로사로 인식되는 기준선이라는 뜻에서 ‘과로사 라인’이란 말이 있는데 그 기준(월 80시간 초과근무)의 2.5배에 달했다.

이에 대해 병원 측은 “과도하게 일을 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의 초과근무는 일률적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수술 참관, 학회 발표 준비, 의료 술기 연습 등은 본인 실력 향상을 위한 공부이지 근로로 볼 수 없다는 게 병원 측 주장이다. 일본에서 시간 외 근로(휴일근무 포함)는 월 100시간 미만으로 제한된다. 2∼6개월간 평균 월 80시간 이내여야 한다. 단, 의사는 병원과의 합의하에 초과근무를 더 하는 게 허용된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의사의 업무에 대해 ‘상사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면 노동시간에 해당한다’고 본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지시인지, 강제성 유무 등을 명확히 판단하는 건 쉽지 않다.

유족 측은 “젊은 의사는 향후 경력이 볼모로 잡혀 있기 때문에 관리자나 선배를 거스를 수 없다. 상사가 불합리하게 대우해도 항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어머니 준코 씨는 “수준이 높다는 일본 의료 시스템은 우리 아들 같은 젊은 의사의 희생과 노력으로 굴러가고 있다”며 한탄했다.

“韓日 의사 기본 인권 지켜져야”
일본 의료계는 노동 강도가 매우 높다. 일본 의료단체 ‘전국의사 유니언’에 따르면 전공의 30%가 연간 1920시간 이상 야근에 시달린다고 조사됐다. 20대인 의사들 중 14%는 ‘일주일에 1번 이상 극단적 선택을 생각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의사단체는 “비행기 조종사가 월 200시간 이상 야근을 하는 게 가능한가. 의료 사고를 일으키지 않고 의료 안전을 지키려면 무엇보다 의사가 건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는 한국 의료계의 열악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2019년 2월 고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의 과로사를 계기로 국내 의료 인력의 과로 실태가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현실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올 1월 공개한 2022년도 전공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전공의 중 52.2%가 주 80시간 이상 근무를 했다. 레지던트 1년 차의 평균 주당 근무 시간은 90시간에 달했다. 전공의 65%는 일주일에 1번 이상 24시간 연속 근무를 한다고 답했다.

기자가 다카시마 씨의 유족 측에 이 같은 한국 의료계 실태를 전하자 유족 측은 “한국도 일본처럼 오래 일해야 훌륭한 의사라고 인정하는 문화가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일본도 한국도 기본적인 의사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선배보다 먼저 퇴근하면 안 된다는 문화, 윗사람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젊은 의사들이 극단적 선택에 내몰리는 게 아니겠는가.”

일본 노동감독청은 다카시마 씨가 일했던 병원과 관리자를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19일 검찰에 고발했다. 다케미 게이조(武見敬三) 일본 후생노동상은 “악질적인 근로기준법 위반에 엄정하게 대처하겠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개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카시마 씨 유족은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는 병원의 대응에 분노를 느낀다. 엄중한 형사 처벌이 내려지고 의료계 과로 문제가 외면받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


#초과근무#과로사#일본 의사#의료계 노동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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