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독재 정권에 게릴라전으로 맞섰던 언론인 이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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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9월 7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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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한 단식투쟁 중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5일 페북에 썼다.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있다. 군부독재의 군홧발이 사라진 자리를 검사 독재의 서슬 퍼런 칼날이 대신하고 있다”고. 현 정부가 다 잘한다고 쉴드 치진 않겠다. 그러나 이재명 자신이 피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것처럼 단식투쟁 벌이는 건 기이한 일이다.

그는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에 기여한 게 없다. 자서전 ‘이재명은 합니다’(2017년)에서도 중앙대 법대 시절(1982~86년) 운동권 친구의 권유에 “이런 건 부잣집 애들이 좀 하면 안 되냐”며 사법고시로 방향을 정했다고 밝혔다. ‘물론 영달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나약함과 기회주의적 요소가 있었던 점도 인정한다’고, 뜻밖의 솔직함까지 드러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 마련된 단식농성 천막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를 주최하는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박형기기자 oneshot@donga.com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에 마련된 단식농성 천막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를 주최하는 도중 물을 마시고 있다. 박형기기자 oneshot@donga.com
‘검사 독재’를 백 사람이 비판한대도 이재명이 언급하면 ‘이해충돌’이다. 기소된 사건도, 앞으로 수사를 받을 사안도 수두룩해서다. 물론 당 대표 아니라 잡범도 단식투쟁을 할 순 있다. 단, 구속될까 겁나 민주주의를 끌어들이는 건 땡깡이다.

● 이재명-문재인이 뭔 민주화운동?
문재인 전 대통령도 신년 초 이재명이 양산을 찾았을 때 “우리가 어렵게 이룬 민주주의가 절대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은 마치 그들끼리 민주화를 이룬 것으로 믿는 모양인데 천만의 말씀이다.

흔히 19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보도가 6월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거나, 문 정권 주변 86운동권이 민주화운동을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해 ‘2·7 추도회’가 있기까지 엄혹했던 80년대, 문재인은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신문에 등장한 적이 없다.

실제 민주화를 이끈 것은 83년 목숨 건 단식투쟁을 벌인 김영삼(YS)이었고, 보도지침을 깨고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였다. 문재인이란 이름은 동아일보 87년 2월 9일자에 처음 나올 뿐이다. ‘검찰과 경찰은 9일 서울대 박종철 군을 추모하는 2·7추도회와 관련…’ 기사 맨 끝 ‘부산지검은 연행자 1백81명 중 金光一 盧武鉉 文在寅변호사와 金영수 金기수 목사 등을 포함, 10여 명을 구속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에서다.

● ‘보도지침’ 가장 많이 깨뜨린 신문
5공 시절 게릴라전을 하듯 온몸으로 신군부의 반민주 폭거와 언론통제에 저항했던 언론인이 4일 세상을 떠났다. 이채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다. 그 뒤 주필, 일민문화재단과 인촌기념회 이사,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을 지냈지만 내겐 여전히 각별한 ‘국장’이었다. 83년 5월 1일 편집국장이 된 다음 12월 15일 첫 수습기자 시험에서 나를 뽑아줬기 때문이다(뒤에 쓰겠지만 개인적으론 고마운 일만 있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암흑기라고 불리는 시대가 있었다’고 이 국장은 저서 ‘언론통제와 신문의 저항’(2003년) 머리말에 썼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다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언론의 역할을 신군부는 ‘보도지침’으로 막은 무도한 정권이다. 어떤 기사는 1단, 어떤 기사는 사진 없이. ‘동아일보는 보도지침을 가장 많이 어긴 신문이었다. 보도지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저항은 끝내 6·10항쟁의 폭발력을 키워온 요소라고 할 수 있다’고 맺음말에 소개돼 있다.

고 이채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왼쪽)과 그의 저서 ‘언론통제와 신문의 저항’ .  동아일보DB
고 이채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왼쪽)과 그의 저서 ‘언론통제와 신문의 저항’ . 동아일보DB
‘암울했던 시절 어느 편집국장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의 풍경과 묘하게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그때도 야당 지도자가 단식투쟁을 벌였고, 국가 명운을 건 총선이 열렸으며, KBS 편파보도를 놓고 시청료 거부 논란이 벌어졌다. 이 국장은 ‘한마디로 품격을 잃어버린 사회’라고 했지만 내 눈엔 40년 후인 현재가 더 품격 없어 보인다. 적어도 그때는 야당 대표가 자신의 ‘방탄’을 위해 쇼 같은 단식을 하거나, 국가기간방송이 이념적 왜곡방송으로 국민을 호도하진 않았다.

● 동아일보 없이 민주화 가능했을까
80년대 우리가 희망했던 나라가, 정치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만 분명한 것은, 83년 5월~86년 말 이 국장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특종보도나 6월 민주화항쟁은 성공 못했을 수도 있다는 거다(저서엔 ‘한 신문은 그 신문 발행인의 인격과 품격과 세계관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고도 적혀 있다).

전두환 시대 신문 제작은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가 반복된 게릴라전 같았다고 이 국장은 썼다. 편집국장들이 청와대로 불려가 점심 먹는 자리에서도 “말 안 듣는 사람은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릴 수도 있소”라는 무지막지한 말도 들었다고 했다(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도 벌어졌다).

83년 5월 18일 전 신민당 총재 YS가 ‘정치활동 금지 해제’를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해도 기사 한줄 나갈 수 없었다. 동아일보는 ‘정치현안’ ‘재야문제’라고 암호처럼 보도했다. 6월 9일 끝내 YS가 병원으로 실려가자 1면 2단, 사진 없이 쓰라는 보도지침이 내려왔다. 이 국장은 초판 5단 크기로 ‘단식 중단’을 보도했다가 다음 판에 줄이는 ‘치고 빠지기’ 게릴라 전법을 썼다. 충격파는 컸다.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으로, 85년 총선 신당 돌풍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1983년 6월 9일 당시 신민당 총재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탄압을 주장하며 실시한 단식을 23일 만에 중단한다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DB
1983년 6월 9일 당시 신민당 총재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탄압을 주장하며 실시한 단식을 23일 만에 중단한다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DB
85년 1월 1일 1면 톱 제목은 ‘국민심판 총선의 해 열리다’였다. 선거는 한개 면, 그것도 여당인 민정당과 관제야당 민한당 중심, 신당인 신민당은 거의 못 쓰는 보도지침이 내려와 있었다. 이 국장은 2월 1일 서울 첫 합동연설회부터 수습기자들까지 몽땅 현장 투입해 2, 3면을 털어 지상 중계했다.

● 법대 위에 육사, 맨 위에 여사 있던 시절
“지금 시대가 유신시대와 달라진 것은 대통령 선출 장소가 장충체육관에서 잠실체육관으로 옮긴 것뿐” “야당은 1중대 2중대 모두 사쿠라” “군은 군으로 돌아가라.” 지금 보면 별 것 아닌 듯해도 당시로선 충격적 유세 발언이었다. “법대 위에 육사 있고 육사 위에 보안사 있고 보안사 위에 여사(女史) 있다”는 말은 끝내 못 나갔으니 5공 서슬이 얼마나 시퍼랬는지 안 봐도 유튜브다.

‘동아일보가 2월 1일 저녁부터(당시는 석간이었다) 대담하게 합동연설회 기사를 보도하지 않았더라면 총선 열기도 그처럼 타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 국장은 저서에 썼다. 타지들도 이틀간 침묵하다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민정당 총 148석, 원내 과반수는 확보했으나 총 유효득표율 35.2%로 사실상 패배였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토론의 장도 열렸다. 이 국장이, 동아일보가 역사를 바꾸는 데 일조한 셈이다.

‘강도 높은 호소 공감의 함성’. 1981년 2월 1일 대통령선거 합동연설회 현장을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강도 높은 호소 공감의 함성’. 1981년 2월 1일 대통령선거 합동연설회 현장을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저서엔 내 얘기도(창피하지만) 한 대목 들어가 있다. ‘김순덕 기자가 2월 1일 오후 3시경 서울 동대문구 공릉동 묵동국민학교에서 합동연설회를 취재하던 중 태릉경찰서 소속 한 사복경찰관에게 신분증을 뺏기는 등 취재를 방해 당했다고 사회면 1단 기사로 보도된 것은 이 때의 일이다’(너무 분해 팔짝팔짝 뛰었던 장면,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 총선 보도 때문에 안기부에서 고문
총선 뒤 이 국장과 이상하 정치부장은 안기부에 끌려갔다. 8월 29일 2판 1면 중간 톱 6단 기사 ‘중공기 조종사 대만 보내기로’가 엠바고 위반이라는 구실인데 실은 총선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동아일보 1985년 8월 29일자 ‘중공기 조종사 대만 보내기로’ 제호 기사.
동아일보 1985년 8월 29일자 ‘중공기 조종사 대만 보내기로’ 제호 기사.
‘남산 안기부에 도착, 지하실로 내려갔다. 아마도 지하 2층쯤인 것 같았다. 군청색 군복으로 갈아입은 다음부터 상당한 시간 동안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 주황빛 전구가 괴물의 눈처럼 침침하게 비추는 방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참기 어려운 폭행을 당했다(중략)…중공폭격기 승무원 송환기사에 대한 심문은 간단히 끝났다. 그때부터 2·12 총선 때의 보도 태도에 대해 오랫동안 심문 당하였다.’

안기부 간부가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인신처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각하도 양해한 사실이다” 라 했다는 대목에선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때 주황빛 전등 아래 당한 고문 때문에 이 국장은 한동안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았다고 들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안보를 빙자한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은 갔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 본성은 외려 퇴락하는 듯하다(86년 동아일보 기획 시리즈로 ‘인간선언 사람답게 살 권리-교권 침해, 당하기만 해야하나’ 기사가 실렸는데 교사의 ‘극단적 선택’이나 스마트폰 문자 욕설 사례만 없을 뿐, 명예훼손 폭행 폭언 같은 슬픈 현상은 지금과 별 차이가 없다).

● ‘땡전뉴스’ KBS, 친북좌파, 그때 그 사람들
독재 아래 국영방송은 어용기관으로 전락한다. 86년 초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중심으로 KBS 왜곡 편파보도에 항의하는 시청료 거부운동이 일어났다. 동아일보는 “KBS 시청료 거부운동, 편파보도 때문 아닌가” 제목으로 국회 질의답변까지 상세히 보도했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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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이용해 동아일보를 공격했다. 그러나 시청자 눈은 밝다. ‘땡전 뉴스’로 유명한 KBS 편파보도를 세상은 다 알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동아에 싸움을 걸어 시끄럽게 된 책임을 물어 KBS사장이 그만두었다’고 이 국장은 썼다(그 분이 2003년 고희의 나이로 출가한 백련사 주지 스님이다. 법명은 지연. 속명은 박현태). 당시는 전두환 때여서 어용방송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치자. 군부독재도 아닌 좌파정권 시절 KBS는 왜 정파적 방송을 했던 걸까.

이젠 다 알려졌지만 그때는 잘 알 수 없었던 친북좌파, 또는 86그룹에 대한 고뇌 또한 저서 에 담겨 있다. ‘80년대 초반부터 중반, 적어도 87년 6월 항쟁까지는 맑스-레닌주의가 강하게 부각되었다. 군부독재타도만 부르짖으면 어떤 사상적 배경에서였든 모두 민주투사라고 불렸던 것이 당연했던 시대였다.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독재정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껏 징하고도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게 아닌지.

● 고맙고도 미운, 존경스런 국장님
개인적인 느낌을 말해도 된다면, 이 국장은 내게 고맙고도 미운 분이다. 수습기자 11명 중 유일한 여기자로 날 뽑아준 각별한 분이지만 이 국장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도발’을 유심히 본 독자들은 기억할 수도 있는데 “기자는 이코노미스트를 보는 기자와 안 보는 기자가 있다”고 말해준 편집국장이 바로 이 분이었다. 정통파 경제기자 출신으로 늘 정상(頂上)을 강조한 엘리트주의자였다(그래서 기자들 사이엔 인기 없는 국장이었다).

나의 평생 아킬레스건이 경찰기자 한 번 못해봤다는 거다. 수습기자 한 달쯤 돼선가 “생활부에서 책상 배치를 하니 들어와 앉으라”며 이 국장이 불러들였기 때문이다(물론 내가 제대로 못하긴 했다). 심지어 결혼한 지 두 달 만에 이 국장은 편집국 아닌 다른 부서로 6개월 파견 명령을 내렸는데 기간이 지나도 복귀시켜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 안했다며, 4층에서 떨어져 죽을까(편집국이 4층) 5층에서 떨어져 죽을까(건물 꼭대기가 5층) 고민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결국 내가 편집국에 돌아온 건 국장이 바뀐 다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국장을 기자로서 존경한다. 그는 어두운 시절 언론의 책무가 젊은이들에게 자유로운 미래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었느냐고 했다. 이 국장은 최선을 다했다. ‘그때의 모든 기억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신문과 주황빛 전등 아래서의 혹독한 고문의 기억’이라고 저서에 남겼기에 나는 이 국장을 기억하는 ‘도발’을 쓴다. 그가 가져다주려던 자유로운 미래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고 믿고 싶다. 삼가 명복을 빈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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