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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나만의 목표, 나만의 기준[내가 만난 名문장/이재호]

이재호 포스텍 전자전기공학과 교수
입력 2022-06-13 03:00업데이트 2022-06-13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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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포스텍 전자전기공학과 교수
“이제 ‘실수가 없는 상태’는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전제조건으로 여겨진다.”

―조너선 비스 ‘하얗고 검은 어둠 속에서’ 중


스튜디오 녹음이 보편화되며 연주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실수 없는 연주들로 이어붙인 음반에 대중의 귀가 맞춰졌기 때문이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음악적 지향점마저 기술적인 완성 그 자체로 바꿔 놓았다.

이와 비슷한 변화를 인공지능(AI) 학회에서도 느낀다. 학회들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15분짜리 동영상이 대면 발표를 대신하게 됐다. 학회가 끝나고 나서도 볼 수 있는 데다 접근성도 좋아서 논문은 건너뛰고 동영상만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눈에 띄는 동영상을 제작하기 위한 경쟁도 시작됐다. 구글, 메타(옛 페이스북) 등 거대 AI 기업에서 만든 좋은 연구 영상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했고, 영국의 한 교수는 강연 영상 제작을 위해 전문 애니메이터를 고용해 화제를 모았다.

AI 분야에서 기업들이 주도권을 잡은 건 하루 이틀 전 일이 아니다. 대기업 연구소에는 실험 장비도 많다. 중견 대학원 연구실에서 3주는 걸릴 실험을 대기업은 1주일 안에 끝내곤 한다. 이렇다 보니, 학회 논문을 심사할 때 쓰는 실험적 검증에 대한 ‘양적인 잣대’도 덩달아 높아졌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실험 규모가 너무 작아서 실용성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게재를 거절합니다”라는 심사평이 흔하다.

이런 시대에 학교 연구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학생들과 면담 중 이런 고민을 나누다 생각지 못한 명쾌한 해답을 얻었다. “기업들이 안 푸는 문제를 풀면 되죠!” 잊고 있었던 단순하고 오래된 진리다. 나만의 연구 목표를 세우고 나만의 기준에서 완성을 추구하는 것. 비록 상대적으로 주목은 덜 받더라도,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연구보다는 낫지 않을까.


이재호 포스텍 전자전기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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