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수호한다는 사명 [특파원칼럼/유재동]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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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중추’ 역할 도서관과 언론
거짓-선동 판치는 세상 최후 보루

유재동 뉴욕 특파원
유재동 뉴욕 특파원
올해 설립 127년째인 뉴욕공립도서관(NYPL)은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공도서관이다. 맨해튼 42번가 본관을 비롯해 뉴욕시 전역에 92개 분관이 있고 장서(藏書)와 디지털 자료는 5600만 점이 넘는다. 얼마 전 이곳에서 뉴욕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간단한 브리핑을 하겠다고 해서 가봤다. 도서관 앞 공원 브라이언트파크에는 푸른 잔디가 5월 햇살을 만나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기자 20여 명 앞에 토니 막스 도서관장이 섰다. 컬럼비아대 교수 출신으로 2011년부터 관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언론과 소통하고 제안도 들으려 자리를 마련했다”며 대뜸 도서관과 언론사 역할이 얼마나 비슷한지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배움을 돕는 일을 하죠, 여러분처럼. 우리는 거짓으로부터 진실을 발라내는 일도 합니다, 역시 여러분처럼.” 기자와 사서(司書)가 비슷한 일을 한다는 말은 이날 처음 들었는데, 곱씹어 볼수록 꽤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도서관학 개론’에는 그것 말고도 귀 기울일 만한 내용이 많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도서관은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돼야 한다”는 보편성 원칙이었다. 실제 막스 관장은 취임 이후 저소득층과 이민자가 도서관을 더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고, 최근에는 시민들에게 연체료를 징수하지 않겠다는 방침까지 밝혔다. 연체료 부과가 가난한 사람들의 도서관 이용을 막는 장벽이 돼 왔다는 이유에서였다. 혹시나 이로 인해 사람들이 책 반납을 게을리하지 않는지 물어봤더니 “오히려 도서 반납과 이용자가 늘어났다”는 답이 돌아왔다. 도서관 이용에 대한 금전적, 심리적 부담이 사라진 것이다.

미국 도서관은 이처럼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을 통해 오랫동안 시민의 지식과 정보 지킴이 역할을 해왔다. NYPL이 2019년 펴낸 ‘뉴욕도서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정은문고)이라는 책은 인터넷이 없던 1940∼80년대 시민들이 도서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본 정말 엉뚱한 질문을 모아 놨다. 가령 ‘이브가 먹은 사과는 무슨 종류인가요’ ‘파랑새는 몇 시쯤 노래하나요’ 같은 질문을 하면 사서가 열심히 관련 서적을 뒤적이며 최대한 성의껏 답해 줬다고 한다. 이런 ‘지식의 중추’로서 소임도 언론사와 닮은 점이다. 예전에 회사에서 당직을 서면 독자들이 자주 전화를 걸어서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 검색 한 번에 알 수 있는 시시콜콜한 정보를 물어보곤 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 같은 ‘지식 자판기’ 기능은 줄어들었지만, 문화 거점과 배움터로서 역할은 점점 커지는 추세다. NYPL은 뉴욕시 곳곳에서 저자 특강과 독서 토론, 전시, 직업훈련을 비롯해 연간 9만 개 넘는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5년 전 연수 때 살았던 로스앤젤레스 인근 도서관도 아직까지 각종 행사 안내 이메일을 보내온다. 최근에는 아시아 식물 재배법, 온라인 사기 대응법 강좌가 추가됐다고 했다. 도서관에는 단순히 책 대출과 반납을 넘어 공동체를 위한 ‘배움의 전당’ ‘지식의 보루’가 돼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NYPL 맨해튼 본관 앞에는 ‘라이브러리 웨이’라는 좁다란 길이 있다. 길바닥 동판에 책과 언론에 관한 위인들의 경구(警句)가 새겨져 있다. 그중 20세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브라크의 격언이 인상적이다. ‘진실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거짓은 꾸며내야 한다.’ 가짜와 선동이 판치는 이 세상에 진실을 수호할 최후의 보루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
#도서관#언론#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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