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준석과 이승열. 어린 시절 각각 칠레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두 교포 청년은 음악을 하기 위해 모국으로 돌아와 송스튜디오와 계약했다. 스튜디오를 집 삼아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하며 앨범을 만들었다. 1993년의 마천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게 외진 곳이었다. 가끔씩 답답할 때면 명동까지 나갔다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둘은 미래와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1994년 유앤미 블루의 첫 앨범 ‘Nothing’s Good Enough’가 나왔다. 앨범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모던 록’이라 이름 붙여진 앨범 속 음악은 1994년이라는 시대 상황에서 앨범 제목만큼이나 낯설었다. 풀어 쓰자면, 당시 한국에선 아직 상륙하지 못하고 통용되지 않는 음악이었다. 이 앨범은 이른바 ‘저주 받은 걸작’이 되었다. 이 앨범이 가치를 인정받고 유앤미 블루란 이름이 다시 소환되는 건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였다.
영원히 청년일 것 같던 방준석이 26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유앤미 블루의 실패에서 경력이 끝난 건 아니었다. 유앤미 블루 해체 뒤에 방준석은 한국에 남아 계속해서 음악을 만들었다. 그의 재능은 영화음악에서 꽃을 피웠다. ‘후아유’ ‘라디오스타’ ‘고고70’ ‘베테랑’ ‘사도’ ‘모가디슈’ 등 수많은 걸작의 영화음악을 남겼다. 우리는 중요한 음악가 한 명을 잃었다.
방준석을 생각하면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신인 음악가를 선발하는 ‘헬로루키’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그는 행사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어린 후배 음악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수상을 하지 못한 한 밴드의 멤버와 차가운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한참을 이야기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유족 명단에 있는 아이의 이름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가 나중에라도 이 글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음악가였으며, 좋은 어른이었다는 것을 그가 알았으면 좋겠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