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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삶이라는 작품, 당신의 역사[2030세상/김지영]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입력 2022-01-18 03:00업데이트 2022-01-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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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제주 ‘해녀의 부엌’에 다녀왔다. 해녀 이야기를 담은 공연과 식사의 융·복합 콘텐츠로, 김하원 대표가 2019년 창업한 회사명이기도 하다. 해녀 집안에서 자란 그는 일본 수출 의존도가 높은 제주 해산물 시장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현지 해녀들, 청년 예술인들과 함께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한 사업을 해오고 있다.

“여기가 맞아?” 공연장이 있을 것처럼은 안 보이는 방파제 인근, 생선 위판장이었던 유휴공간을 개조한 곳이었다. 육중한 쇠문 너머로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공간을 잠식한 몽환적인 조명은 자세히 보니 어망으로 만든 것이었다. 마침내 극이 시작됐다. 올해로 90세인 해녀 할머니의 실제 이야기였다. 극 말미 할머니가 등장해 앳된 배우에게 “엄마”라 부를 때, 곳곳에서 눈물이 터졌다. 뒤이어 채취한 해산물 이야기와 이를 요리한 식사가 이어졌고, 할머니와의 질의응답으로 끝을 맺었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해 나가는 모든 이들을 존경하지만, 90대 할머니와 20대 청년이 맞잡은 손에는 단순한 창업가 정신 이상의 울림이 있었다. 전통과의 연대, 여성들의 서사 등 여러 가지 앵글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그날 밤늦도록 나를 붙든 것은 한껏 신이 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던 할머니의 표정이었다. 다 큰 어른들이 눈을 반짝이며 할머니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모두가 함께 ‘착한 손주들’이 된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나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재작년 돌아가신 할머니는 1933년생이셨다. 6·25전쟁이 일어나던 해 18세, 5·18민주화운동이 있던 해 48세로, 그야말로 근현대사를 관통해 온 가장 가까운 증인이었다. 대입 후 지적 호기심으로 한참 교과서 밖 역사를 탐구하던 시절, 언젠가 한 번은 할머니를 인터뷰해 봐야지 생각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 말고, 그해 마음은 어떠셨는지. 오늘 점심으로 뭐 드셨는지 말고, 그 시절 끼니는 어떻게 챙기셨는지. 나의 할머니이기 이전 당신은 어떤 삶을 견뎌 오셨는지. “할머니, 다시 전화할게!” 숱한 안부전화의 끝, 한국사 자격증은 땄지만 정작 당신의 역사는 묻지 못했다.

무대 위 해녀 할머니 모습에 우리 할머니를 덧대 보았다. 참 좋아하셨을 텐데, 우리 할머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짓이라도 한 번 더 하게 됐다. 박수라도 조금 더 치게 됐다. 어쩌면 몇몇은 나처럼 미처 여쭙지 못한 할머니 이야기를 상상하고 있었을까. 공연을 마친 해녀분들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내 인생 부끄럽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래도 잘 살아왔구나’라고 한다. 저기 저 무대에 우리 할머니, 옆집 아저씨, 그 누구를 세워놓더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시대를 관통해 온 모두의 이야기는 귀하다. 박수받고 환호받을 가치가 있다.

취지와는 무관할지 모르나 나는 ‘해녀의 부엌’을 넘어 농부의 부엌, 상인의 일터, 작가의 책상을 상상했다. 개인의 삶이 하나의 작품으로서 존중받고 응원받는 곳. 그 존재에 감사하다. 언젠가 비매품으로라도 부모님 인터뷰집을 만들어 봐야지 생각했는데, 내친김에 오늘 몇 개라도 질문을 던져 봐야겠다. 그해 마음은 어떠셨는지,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삶을 지켜오고 계셨는지. 이번에는 결코, 늦지 않을 것이다.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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