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의 미나리 한 단[동아광장/김금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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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종결, 잠시 생의 속도 가늠하란 뜻
익숙한 식재료 우리 삶에 스며든 고귀한 것
때론 엉망인 일상도 잘 다듬어 요리하길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이제 작년이 된 2021년의 12월, 미나리 한 단을 선물받았다. 작은 책자를 보내면서 누군가 상자에 함께 담아준 미나리였다. 푸르고 얇고 하늘하늘한 잎들, 만져만 봐도 상상되는 아삭거리는 식감. 잘못 사면 억세고 질겨 미나리의 참맛을 즐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 싱싱한 미나리 한 단이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혼자 먹기에는 양이 꽤 많았다. 엄마가 가까이 살면 나눠 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거리 두기가 다시 시작되면서 아버지는 당신 생신에도 가족들에게 모이지 말라고 한 터라 어차피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외로워졌다. 한 해를 보낸다는 건 어쨌든 그간의 축적을 무너뜨리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 아닌가. 아무리 찬란한 일 년을 보낸 사람이라도 어딘가 등 떠밀리는 듯한 아쉬움과 쓸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양이 많더라도 미나리 한 단을 다 먹겠다는 연말의 결심을 했다.

하지만 당장 마감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미나리를 베란다에 두었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사흘쯤 지나 거의 비명을 지르며 미나리의 존재를 떠올렸을 때는 다행히 상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의 그 생기는 잃은 채였다. 나는 밖에다 둔 실수를 탓하며 냉장고에 넣었고 곧 이걸 데쳐서 맛있게, 혹은 탕을 끓여 향긋함을 누리며 먹으리라고 별렀다. 그러나 또 시간이 바삐 흘렀다. 겨울 들어서야 겨우 시작한 소설 작업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번아웃으로 한동안 쉬었는데도 쓰는 일은 그전과 다를 바 없이 어려웠다. 당연한 듯 불면이 이어졌고 늘 그렇듯 위통이 와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자판을 오래 치다 보니 손가락에 무리가 왔고 정형외과에 가서 생전 처음 파라핀 치료라는 것을 받았다. 하필이면 가운뎃손가락이 문제여서 엑스레이를 찍을 때 방사선사가 조심스럽게 “그 욕하는 자세 좀 취해 보세요”라고 동작을 지시한 것이 마감의 긴장을 잊어본 가장 유머러스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쓰는 사람의 일상을 엉망으로 만든 뒤에야 조금씩 나가는 소설이라는 결과물은 이 일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버겁고 심지어 미워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뿐 아니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가 직업으로 삼는 모든 일이 그러할 것이다.

냉장고의 미나리를 떠올린 건 성탄절이 지나서였다. 꺼내보니 잎이 다 시들어 있었다. 사람에게 어떤 주기가 있는 것은, 한 해의 종결이 있는 것은, 잠시 멈춰서 자기 생의 속도를 가늠해 보라는 뜻이 아닐까. 하던 일도 마무리하며 내일을 준비해야 할 때 새로운 일을 벌여 그 속도에 허덕이다 보낸 12월은 어쩐지 비뚜름하게 기울어진 날들 같았다. 미나리 한 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일상이란 괜찮은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늦었지만 미나리를 조금 꺼내 다듬었다. 잎들은 떼어내고 줄기는 손질해 냉장고에 있던 채소들과 잡채를 만들었다. 어려서 내가 잡채를 무척 좋아하는 어린이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잡채를 먹는 ‘스케일’에 놀란 친구 엄마가 귀띔해주면서 엄마가 좀 더 자주 잡채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도. 엄마에게 새해 인사를 할 때 그때의 그 맛있는 보살핌에 대해 고마움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에는 미나리전을 부쳐 먹었다. 호박을 썰어 넣으면 미나리의 서걱거림과 호박의 무르고 부드러운 식감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가 익히 아는 그 ‘안전한 맛’이 된다. 먹는 사람을 느슨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식재료의 힘은 수없이 사용되고 오랜 시간 삶 속에 스며든 일부의 존재들만 가질 수 있는 고귀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두부가 그렇고 파나 마늘, 호박이 그럴 것이었다. 그런 것, 늘 곁에 있기에 특별해지는 것. 내년에는 일이든 관계든 그런 힘을 갖추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날, 이제 잎이 노랗게 된 미나리를 손질해 볶음밥을 만들었다. 연말이었지만 어디 나가서 먹을 엄두는 나지 않았고 배달 대란이 일어나 어디에 주문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미나리 한 단을 다 먹고 나자 비로소 한 해를 보내고 새날을 맞을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어쨌든 한 해의 결심은 어렵사리 지킨 셈이니까. 2022년에도 일상은 때로 흔들리고 엉망이 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것을 잘 다듬어 요리할 날들 또한 어김없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삶 어딘가에 푸릇한 미나리 한 단쯤은 품고 가는 검은 호랑이해가 되길 빈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미나리 한 단#한 해의 종결#생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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