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헌재]‘필드의 구도자’ 이정민, 인생은 결과보다 과정이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입력 2021-10-27 03:00수정 2021-10-2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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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다. 주말 골퍼들도 비슷하다. 소소한 내기라도 걸려 있을 때 동반자의 ‘OB’를 아쉬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프로의 세계는 더욱 심하다. 상대방이 실수하면 내 성적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정민(29·한화큐셀)은 특별한 골프 선수다. 2015년 6월 한국여자오픈에서 했던 그의 행동은 지금도 골프계에서 회자되곤 한다.

2억 원의 우승 상금이 걸려 있던 그 대회 최종 라운드 챔피언조에서 그는 박성현(28)과 맞붙었다. 박성현이 5타 리드를 안고 출발했지만 당시만 해도 우승 경험도 없던 박성현은 잇달아 보기와 트리플 보기를 범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박성현의 추락을 기쁘게, 최소한 무심하게 지켜봤을 터.

하지만 이정민은 달랐다. 1타 차까지 쫓긴 후 표정이 굳어진 박성현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긴장돼?”라고 물었다. 박성현이 “그렇다”고 하자 “침착하게 하라”고 따뜻하게 조언을 건넸다. 그 한마디에 페이스를 되찾은 박성현은 이정민을 2타 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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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성현의 골프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승리의 물꼬를 튼 박성현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만 10차례 정상에 올랐다. 이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 진출해 7번의 우승과 함께 세계 랭킹 1위에까지 올랐다.

이정민에게 “그때 왜 그랬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더 잘할 수 있는 친구였는데 전혀 자기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보였다. 나도 잘하면 좋겠지만 같이 잘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이었으니 다른 선수들에게 선뜻 손을 내밀 수 있었다. 그는 또 “아마추어 때 내가 골프가 안될 때도 많은 언니들이 경기 중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저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선수들도 많다”고 했다.

이정민에게 중요한 건 성적이나 우승 횟수가 아니었다. 그는 골프의 의미를 ‘준비’와 ‘과정’에서 찾는다. 2016년 3월 8승째를 거둔 뒤 5년 넘게 우승을 못 할 때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날이 발전하는 골프가 목표인 그에겐 언제부턴가 ‘필드의 구도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의 9번째 우승은 갑자기 찾아왔다. 지난주 끝난 KLPGA투어 동부건설·한국토지신탁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서 버디 10개를 잡아내며 정상에 올랐다. 평소답지 않게 두 팔을 벌려 기쁨을 표현했다. 그가 기뻤던 건 상대 선수를 꺾어서가 아니었다. 매번 두려움과 상처 속에 이겨내지 못했던 부담을 떨쳐내고 스스로 우승을 결정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 많이 노력했다. 매일매일 똑같이 계속 노력했다. 앞으로도 1mm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매일매일 또 노력하면서 살아가려 한다”는 우승 소감을 밝혔다.

정말 많은 동료들이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다. 그 가운데는 잠시 슬럼프를 겪고 있는 박성현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썼다. “매일 노력하고 매일 시도했다는 그 말이 참 멋졌어요. 언니를 보면서 ‘이런 게 골프지’라고 또 느꼈어요. 감사합니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필드의 구도자#이정민#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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