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용관]또 바뀐 국정원 원훈

정용관 논설위원 입력 2021-06-07 03:00수정 2021-06-07 08:53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각국 정보기관의 모토엔 ‘혼’이 담겨 있다. 이스라엘 모사드의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가 대표적이다. ‘4000년 디아스포라’의 고통이 스며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성경 구절을 본부 벽에 새겨놓았다. 10일로 창설 60주년을 맞는 우리 국가정보원 원훈(院訓)이 5년 만에 또 바뀌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다.

▷1961년 ‘한국형 CIA’를 표방하며 출범한 중앙정보부의 모토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은 “응달에서 묵묵히 일하는 걸 몰라줘도, 국정 책임자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쓰면 그게 바로 양지를 사는 것이다”는 취지였다고 했다. 애초 최고권력자를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JP는 뒤늦게 회고록에 “음지와 양지 정신이 훼손됐다”며 책임을 느낀다고 했지만, 태동할 때부터 나쁜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이종찬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은 CIA 분석국장을 지낸 셔먼 켄트의 ‘정보란 지식이다’라는 정의를 본떠 ‘정보는 곧 국력이다’로 원훈을 바꾸겠다고 보고했다. DJ는 ‘곧’을 빼고 휘호를 써주었다고 한다. 또 휘호 아래 ‘대통령 김대중’이라는 글을 새기지 말라고 지시했는데, 실제 원훈석에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고 당장 지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름은 빠졌지만,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 원훈이 바뀔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DJ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때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교체된 데 이어 2016년 박근혜 정부 때 또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의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로 바뀐다. 딱히 바뀐 원훈에 심오한 메시지가 담긴 것 같지도 않다. DJ 정부의 원훈석도, MB 정부의 원훈석도 모두 폐기됐다.

관련기사
▷이번에 바뀐 원훈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 바로 국정원의 본령”이라고 한 발언을 압축한 것이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간 복역한 고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이른바 ‘신영복체(어깨동무체)’를 썼다고 한다. 문 대통령 대선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과 같은 서체다. 스파이 활동을 ‘비밀절도’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이중 스파이를 ‘두더지’라고도 한다. 목숨을 걸고 일한다. 또 그래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원훈이 바뀌니 사명감을 주기보다 묵묵히 일하는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정용관 논설위원 yongari@donga.com
#국정원#원훈#변경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