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드라 머리 베기’ 같은 입법 만능주의[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입력 2021-05-07 03:00수정 2021-05-07 04:03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뱀 히드라를 무찌르는 영웅 헤라클레스를 묘사한 고대 그리스의 토기. 머리 하나를 베면 두 개가 나오는 히드라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미국 게티뮤지엄 소장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법무부’(the Ministry of Justice)와 ‘법무부 장관’(the Minister of Justice)에는 모두 ‘정의’가 들어간다. 법과 정의가 하나이고 합법적인 것이 정의롭다는 생각은 서양 사상의 오랜 유산이다. 고대 그리스의 법 관련 용어들에도 ‘정의’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재판, 재판관, 재판정에는 모두 ‘정의’를 뜻하는 ‘dike’가 들어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법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이 있고, 이들이 존재하는 한 법과 정의의 가치에 대한 질문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법과 정의를 따르는 것이 정말 좋은 일인가? 법을 어기면서도 처벌을 피한다면 그것이 더 좋지 않을까? 법과 정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처벌을 피할 힘이 없는 약자의 논리가 아닐까?》

내게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마법의 반지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반지 덕분에 나는 시계 전문점에서 2억 원짜리 바쉐론 콘스탄틴을 훔치고 마약을 밀매하며 시험 문제를 빼돌려 명문대학에 합격하거나 대기업에 취직한다. 몰카를 쓰거나 드론을 띄우지 않아도 관음증 욕구를 실컷 채울 수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양치기 기게스가 이런 마법의 반지를 우연히 손에 넣는다. 그는 반지를 이용해 왕비와 간통하고 왕을 살해한 뒤 권력을 차지한다. 이런 반지의 소유자는 진짜 강자(强者)가 아닐까? 그런 강자가 법과 정의를 지키려 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권력의 반지, 돈의 반지, 학식의 반지를 이용해 법 위의 세상에서 좋은 삶을 살고 있나? 그러니 ‘정의로운 삶이 좋다’는 순진하고 무능한 약자의 생각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자!

●권력 반지의 노예들


주요기사
이런 반론이 옳다면, 플라톤의 ‘국가’야말로 폐기 대상 1호로 손꼽힐 만하다. ‘국가’는 법과 정의의 가치를 조롱하는 주장들에 맞서 ‘정의를 구원’하기 위해 쓴 대화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든 서양 철학의 대표적 고전이니, 던져 버리기 전에 플라톤의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인지 한번 따져보는 게 좋겠다. 이런 질문부터 해보자. 기게스의 반지가 정말 우리에게 좋은 것을 뭐든지 안겨줄 수 있을까? 반지를 통해 얻는 것이 많다고 해도, 세상에는 반지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더 많다. 남의 눈을 피한 성폭행은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몰래 얻는 합격증은 앎을 주지 못한다. 금테 두른 합격증은 텅 빈 머리의 빛나는 증거일 뿐이니까. 타인의 인정은 더더욱 반지 효과와 거리가 멀다. 인정과 명예에는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스물둘의 나이에 동방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는 처음부터 압도적인 수의 페르시아 대군과 맞서야 했다. 노련한 장군들이 조언했다. “낮에 싸우면 이기기 어려우니 밤에 기습합시다.” 젊은 왕은 대꾸했다.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소.” 투명인간은 제왕의 권위를 누릴 자격이 없다. 반지가 인간의 모든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이 특별히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 본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에는 ‘한 줌의 도덕’이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반지의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반지를 통해 욕망을 채우려는 자는 아주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 습관은 힘든 일을 견디게 하고 그런 일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얻게 해 준다. 이 즐거움이 더 힘든 일로 나를 자극하면서 내 안의 잠재성을 실현시켜 준다. 반지는 이 모든 과정을 파괴한다. 반지를 통해 사랑이 아닌 성적 만족을 얻고 대낮의 인정이 아닌 야밤의 권력을 얻고 앎이 아닌 증서를 얻은 자들은 사실 ‘반지의 주인’이 아니라 ‘반지의 노예’이다. 삶 전체를 노예에게 의탁한 무능한 주인처럼 그는 반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지를 통해 욕망을 채우면서 일그러진 이 노예의 모습을 컴퓨터그래픽(CG) 기술로 재현하면, 그 겉모습은 영화 ‘반지의 제왕’의 골룸과 비슷하지 않을까? 기게스가 발견한 반지는 송장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권력의 반지, 돈의 반지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자들은 영혼이 빠져나간 송장이다.

●지혜를 통해 얻는 인간의 덕


정의를 구원하려는 철학자 플라톤은 반지의 노예 상태와 정반대의 상태를 상상한다. 인간이 가진 다양한 능력과 욕망이 적절히 충족된 상태가 그것이다. 인간에게는 온갖 신체적 욕망을 포함해서 인정 욕망, 앎의 욕망 등이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 가운데 앎의 욕망을 잘 실현해서 지혜를 갖추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지혜 없이 쾌락에 탐닉하면 몸이 망가지고, 지혜 없이 인정과 명예를 추구하면 패가망신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지혜를 갖출 때 다른 욕망들도 절제, 용기 등의 덕(德)을 얻어 잘 실현될 수 있다. 이렇듯 인간에게 속한 갖가지 욕망이 저마다 알맞은 덕을 갖추고 잘 실현되면서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상태, 이런 상태를 일컬어 플라톤은 ‘정의’라고 부른다. 이런 정의의 상태는 신체의 여러 기능이 균형을 맞추어 잘 작동하는 ‘건강한 상태’와 같다.

이제 영혼의 이런 건강 상태를 ‘법적 정의’와 구별해서 ‘도덕적 정의’라고 불러보자. 이 정의에 비추어 보면, 법을 어기면서 육체적·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들은 신체의 본바탕이 망가진 채 온갖 음식과 쾌락을 탐하는 자들과 같다. 그가 법 위에 군림하면서 얻는 ‘좋은 것들’이란 눈먼 탐욕의 노예를 점점 더 옭아매는 쇠사슬일 뿐이다. 처벌이 무서워 법을 지키는 것은 ‘약자’일지 몰라도, 인간의 타고난 능력과 욕망을 잘 실현하기 위해 덕과 역량을 갖추는 것은 진정한 ‘강자’의 길이다. 진짜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은 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법을 어겨서라도 ‘좋은 것’을 얻으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반지의 노예들이다.

그리스 아테네 아카데미아 근처 광장의 플라톤 흉상. 조대호 교수 제공


●도덕적 정의 강조한 플라톤


플라톤의 정의론이 우리를 설득할 수 있을까? 도덕적 정의에서 오는 좋음이 정말로 불법적으로 얻는 좋음보다 더 좋은 것, 진짜 좋은 것일까?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대답은 분명하다. 도덕적 정의를 벗어나서는 어떤 좋음도 없다. 이 정의에서 벗어나면 위조합격증처럼 ‘좋게 보이는 것들’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사회적 삶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법이 도덕적 정의를 지향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도덕이 법에 우선한다. 법에 매달려 도덕을 무시하는 세상을 향해 플라톤이 하는 말이 있다. 도덕이 무너진 나라에서 자행되는 수많은 잘못을 입법을 통해 막으려는 것은 “히드라의 머리를 베는 일”과 같다. 히드라 머리는 하나를 베면 두 개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20대 국회 회기에 만들어진 법안이 약 2만 개. 독일, 프랑스, 영국의 몇 십 배에 해당하는 양이라고 한다(녹색평론 176호, 31쪽). 우리는 정말 히드라의 머리를 베고 있는 꼴이 아닐까?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히드라#입법#만능주의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