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검찰총장의 불문율’[오늘과 내일/정원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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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進수사 비토론 감수하고 두 번째 총장 임명
강제 퇴임 등은 24년간 금기 깨는 돌출 변수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2018년 상반기 더불어민주당 핵심 관계자에게 윤석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은 적 있다. 법조계 동향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다음 검찰 인사 때 무조건 수사권이 없는 고검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부터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돼 여권의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이끌고 있었는데,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는 “제어가 안 된다. 우리한테 칼끝이 올 수 있다”고 했다. 한때 윤 지검장을 고검으로 보내는 방안이 검토됐지만 서울중앙지검장 자리를 2년 동안 지켰다.

지난해 상반기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의 차기 검찰총장 후보자로 윤 지검장이 하마평에 오르내릴 때였다. 한 검찰 고위 인사는 “윤 지검장에게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총장이 아니라 마지막 총장이 어떠냐는 제안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 인사는 “윤 지검장의 수사 스타일과 두 번째 검찰총장은 잘 맞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했다. 통상적으로 정권의 레임덕을 불러올 수 있는 검찰 수사는 두 번째 검찰총장 때 많이 불거졌고, 두 번째 총장이 2년 임기를 다 채운다면 세 번째 총장은 대통령의 잔여 임기가 1년이 남지 않은 내년 7월 시작한다.

여권 내 ‘윤석열 비토론’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6월 17일 두 번째 검찰총장 후보자로 당시 윤 지검장이 지명됐다. 국회 인사청문회는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 발동의 근거로 꺼낸 윤 후보자 가족과 주변 문제 의혹 등이 불거져 심야까지 이어졌다. 야당의 날 선 공격을 여당이 방어함으로써 윤 후보자는 인사청문회를 마무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명장을 주면서 “청와대든 정부든 여당이든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공정한 자세로 임해주길 바란다”는 격려를 했다.

임명장을 받은 당일 오후 윤 총장이 직접 썼다는 취임사가 공개됐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언급하면서 “형사 법집행은 오로지 헌법과 법에 따라 국민을 위해서만 쓰여야 하고, 사익이나 특정 세력을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직후 검찰 인사도 윤 총장의 뜻대로 단행됐다. “여권의 자신감이 이 정도였나”라고 할 정도로 놀랐다는 법조인들이 많았다.

22일 윤 총장의 임기 중 마지막 국회 국정감사를 보면서 가장 눈길이 간 답변은 권력형 비리를 수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살아 있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법을 집행해야 살아 있는 권력 또한 국민들에게 정당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도 검찰의 엄정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살아 있는 권력을 전현직 대통령, 사법부, 국가정보원, 대기업 등 윤 총장이 지휘해 왔던 수사 아이템으로 바꾸면 윤 총장이 평소에 했던 말과 거의 일치한다. 총장 취임 이후 여권이 윤 총장을 다르게 보는 계기가 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등을 수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늘 “이번에 제대로 수사해야 ○○이 결과적으로 수혜를 입는다”며 직진(直進) 수사를 강조해 왔다.

인사권을 뺏고, 수사지휘권을 박탈하고, 감찰로 압박한다고 윤 총장이 달라질까. 둘러 가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는 스타일상 아마 더 독을 품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국감에서 윤 총장이 무력시위 하듯 퇴임 후 봉사활동을 언급하면서 정치와는 선을 긋지 않은 이유 중 하나라는 게 윤 총장과 가까운 인사의 얘기다. 1996년 김도언 전 검찰총장의 국회의원 출마 이후 역대 검찰총장은 “총장보다 더 높은 직위는 없다”며 정관계에 진출하지 않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윤 총장에게 우호적인 검사들 중 절대다수가 지금은 정계 진출에 반대한다. 하지만 인사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수준의 윤 총장 강제 퇴임이나 그보다 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한다면 그 불문율이 깨질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검찰총장#비토론#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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