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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여객기 납북 51년, 국민 여태 잡혀 있는데 정부는 손놓아”[논설위원 현장 칼럼]

입력 2020-10-14 03:00업데이트 2020-10-1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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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KAL기 납북 피해 가족의 恨
1969년 12월 납북된 KAL 승객 피해자의 아들 황인철 씨가 최근 당시 사건으로 여객기가 돌아오지 못한 김포공항을 찾아 활주로를 오가는 KAL 여객기들을 보고 있다. 아래 사진은 KAL기 납북이 머리기사로 실린 1969년 12월 12일자 동아일보 1면.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동아일보DB
구자룡 논설위원
“오래전 여객기 납치 사건이라 현장이 없는데 어디서 만나 얘기를 들으면 좋을지?”

“원래 비행기가 오려고 했던 곳이 김포공항이었으니 거기서 만나지요!”

1969년 대한항공(KAL) 여객기 피랍 때 부친이 납북된 황인철 씨(53)를 최근 김포공항에서 만났다. 그는 KAL 납북과 관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86호 채택 50주년이었던 지난달 9일 유엔에 부친 송환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고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메아리 없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어느덧 51년의 세월이 흘러 돌잡이였던 아들은 얼굴에 잔주름이 생긴 중년이 됐지만 사건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다.

대관령에서 기수 돌려 北으로

황인철 KAL기 납치 피해자 가족회 대표가 송환 유엔 결의 채택 50주년인 지난달 9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RFA 제공
1969년 12월 11일 오전 9시 반 강릉발 김포행 첫 비행기 YS11A가 강추위로 김포공항 활주로가 얼어 이륙이 갑자기 취소됐다가 낮 12시 25분 운항을 재개했다. 시간이 바뀌어 탑승을 취소한 사람도 있지만 64인승 쌍발기에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이 탑승했다. 승객 중에는 권총을 소지한 간첩 조창희(당시 42세)가 있었으나 보안 검색에 걸리지 않았다.

이륙 후 약 10분. 비행기가 대관령 고개를 지날 때 객실 앞부분 좌석에 있던 한 남성이 급히 조종석으로 들어갔다. 조종석과 객실 통행이 차단되지 않던 때였다. 잠시 후 여객기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여승무원의 다급한 안내방송이 나왔다. “비행기가 납치됐다. 가지고 있는 신분증이나 사진을 모두 찢어서 없애 달라.” 어느새 북한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양쪽에서 호위하며 여객기는 북상했다. 한국 공군기 2대가 뒤늦게 출동했으나 때는 늦었다. 여객기는 함흥 연포 비행장에 착륙했다.

‘특수이산가족’이 된 미귀환자

1970년 2월 14일 판문점. KAL기 납치 피해자들이 돌아왔으나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 그리고 조창희를 뺀 39명이었다. 억류 65일간 납치 피해자들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세뇌 교육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북한은 비행기 변기에 찢어서 버린 사진과 신분증도 찾아내 신원을 확인해 신문을 했다. 손모 씨(당시 27세)는 돌아왔으나 20일간의 전기고문과 약물주사 등으로 언어기능 장애를 일으켰다.

2001년 2월 26일 평양고려호텔 이산가족 상봉장.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23세에 KAL 승무원으로 입사했던 성경희 씨가 김일성대 교수인 남편, 20대의 아들딸과 함께 ‘특수이산가족’으로 나와 남측의 모친을 만났다. 다른 미귀환자 10명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북측은 ‘소재 불명’ ‘생사 불명’이라고 둘러댔다.

북한은 앞서 1958년 2월에도 부산발 서울행 KNA 소속 여객기 ‘창랑호’를 경기 평택 상공에서 납치했으나 승객과 승무원 26명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더니 YS11A는 미귀환자 송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북에 남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항공기 납치 및 테러는 1987년 11월 115명이 탑승한 KAL 858기를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파하는 만행으로 이어졌다.

공무원 피살 손놓은 정부, 납북도 방치

“모이지 못한 지 오래입니다. 미귀환자 부모는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연로한 분이 많아….”

황 씨는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는 ‘KAL기 납치 피해자 가족회’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북한의 모르쇠, 정부의 무성의와 무신경 그리고 일부는 북에 남은 가족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걱정까지 더해져 ‘피해자 가족회’ 활동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25세에 납북된 승무원 정경숙 씨의 오빠 정현수 옹(90)은 전화통화에서 “피해자 11명의 가족이 모여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으나 이제는 지쳤다”고 말했다. 정 옹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동생에게 KAL 채용 공고를 알려준 것을 안타까워했다. 모친은 2000년 눈을 감으면서도 “딸을 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남편(당시 41세)이 납북된 이모 씨도 아들과 20년 넘게 정부 부처를 찾아다녔지만 “오히려 북한 말만 앵무새처럼 전하는 정부에 지쳤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토로했다.

“북한이 1983년 ‘항공기 불법 납치 억제에 관한 국제 협약’도 비준해 납치 피해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의무이기도 하다고 했더니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협약 가입 전에 벌인 일이라 어쩔 방법이 없다는 듯이 답변했습니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황 씨가 다소 격앙됐다.

“하기야 눈앞에서 국민을 사살한 것을 보면서도 제대도 막지도 항의하지도 않는데 50년도 더 지난 일을 꺼내려고나 하겠습니까!”

“사건 자체 모르는 국민도 많을 것”

황 씨는 지난달 9일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과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 외교부 등에 부친의 송환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올해 5월에는 유엔 인권이사회 산하 ‘강제적 구금에 관한 실무그룹(WGAD)’에서 자신의 부친이 강제구금 때문에 송환되지 못했다는 판단도 처음으로 받아냈다. 그는 피해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지난해 12월 KAL기 피랍 50년과 올해 유엔 결의 채택 50주년에 1인 시위를 벌였다. 2007년 다니던 출판사도 그만두고 건설현장 일용직 등으로 생활하며 부친 송환에 매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상공에서 비행기를 납치해 아직까지 피랍자를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사건이 잊혀져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는 “KAL기 피격 사건과 헷갈리고 납치 사건은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부친이 살아있다고 확신해 활동을 그만두지 않고 있다. 황 씨의 부친 황원 당시 영동MBC PD(당시 32세)는 그날 직속 상사 대신 서울 출장길에 올랐다가 납치됐다. 이듬해 1월 1일 황원 씨는 피랍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가고파’라는 노래를 불러 모두가 눈물 속에 합창을 했는데 이 사건 뒤 어디론가 끌려갔다고 귀환자들은 증언했다.

납치됐다 돌아온 승객 현모 씨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 중에는 북한에 당당하게 맞선 사람들도 있었다”며 “영동MBC의 황 PD와 카메라맨 김봉주 씨(당시 28세)도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황 씨는 브로커 등을 통해 생존을 확인한 부친을 2013년 초 신의주까지 나오게 했으나 그해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후 국경 경비가 강화되면서 탈북이 무산됐다. 그 후 2017년 황해북도 사리원에서 봤다는 소식도 들었다.

황 씨는 송환 요구 투쟁이 힘겨워 보인다는 말에 의외의 답변을 했다. “터무니없는 현실에 분노만 하면 못 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오래 견디지 못합니다.”

납북자 송환 노력, 韓日의 차이

스가 요시히데 신임 일본 총리는 지난달 24일 문재인 대통령과 가진 첫 전화통화에서 납북자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심을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일본의 노력을 지원 지지하겠다고 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회고록에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아베 신조 총리가 주문한 것은 납북자 문제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에게 직접 얘기해 일본에 대해 할 도리는 다한 셈이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규정한 납북 피해자는 17명으로, 5명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평양 회담 직후 돌아왔다.

일본인 피해자는 니가타 해변 등에서 납북됐지만 한국은 KAL 여객기, ‘동진 27호’ 어선, 북-중 국경에서 납치된 7명 등 납치 수법도 다양하고 인원도 많다. 휴전 협정이 되기 전까지 6·25전쟁 기간 납치된 민간인(2017년 4월 총리실 보고서) 9만4000여 명과 미귀환 국군포로 8만여 명도 있다. 이 중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여서 시간도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북한에 억류돼 있던 국군포로들은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을 데려갈 수도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고 한다. 김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다녀왔지만 납북자는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 납북자를 돌려보내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우리 땅의 하늘에서 대낮에 납치된 여객기에 탑승했던 피해자들이 돌아오지 못해도 국가가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는 것인가. KAL기 납치 피해자에 이어 지난달 서해에서 피격된 공무원의 형 이래진 씨도 서울유엔인권사무소를 찾아다니며 조사를 요청하고 있다. 국가와 정부가 국민 보호에 손을 놓거나 소홀할 때 한 개인이 감당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생각하게 하는 요즘이다.

구자룡 논설위원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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