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길 괴롭히는 탈북 이산의 아픔[오늘과 내일/신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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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없는 북한에서 ‘증발’ 시도하다 딸 잃은 조성길 부부 아픔에 공감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7일 오후 채널A 스튜디오에서 만난 고영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한국행 사실이 언론 보도로 드러나면서 난처한 지경에 처한 북한 외무성 후배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대사관 대사대리의 처지가 남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1991년 콩고 주재 북한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일하다 자유를 택한 그는 가족을 버렸다는 아픔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는 방송에서 “탈북 기자회견을 한 직후 평양의 어머니가 차에 실려 어디론가 갔다는 이야기를 뒤에 탈북한 여러 사람을 통해 들었다”고 말했다.

최고위급 탈북자인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도 가끔 북에 두고 온 아내 박승옥 씨에 대해 말하곤 했다. 한국행을 결심한 뒤 아내에게 알리느냐 마느냐를 끝까지 고민했다고 한다. 남편이 해외 출장을 간다며 집을 나서면서 남한으로 간 사실을 알게 되었을 아내를 위해 비통한 사죄의 마음을 담은 편지 한 통을 남겼다.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모진 박해 속에서 죽어 가리라고 생각하니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반하였소. 나는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 주길 바라오. …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세상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저세상에서라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소.”

가족에 경중이 있을 리는 없지만 최근 탈북하는 ‘젊은’ 탈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대상은 바로 자녀들이다. 2016년 탈북한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지금도 두 아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탈북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교사였던 부모는 변방인 함경북도 명천과 명간 출신이었지만 자신은 평양에서 태어나 ‘미국의 시대, 영어를 배우라’는 어머니 덕분에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외교관이 되어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까지 오르는 동안 김씨 3대 세습 독재 체제의 혜택을 누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라나는 두 아들마저 김정은 3대 세습 독재자의 하수인이 되는 것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는 게 그가 탈북한 결정적인 이유다. 북한 외교관들이 대한민국으로 증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녀를 모두 데리고 나가지 못하도록 한 규정을 넘어야 했다. 그는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나는 매우 운 좋게도 두 아들과 함께 영국에 올 수 있었다”고 썼다. 지난해 사석에서 꼬집어 물어보았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는 아이들에게 자유를 선물하겠다는 목적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아직 만나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1975년생으로 1962년생인 태 의원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조성길 전 대사는 더더욱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 좋은 태 의원과는 달리 조 전 대사는 첩보영화와 같은 탈출 과정에서 딸을 놓쳤다. 그가 왜 유럽과 미국을 두고 한국행을 택했는지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지난해 7월 입국한 뒤 은둔해 온 이유는 충분하다. 바로 북한으로 송환된 딸의 안위 때문이었던 것이다.

낳아 키운 엄마에겐 자식과 생이별한 자유보다 자식과 함께하는 독재의 속박이 더 나아 보였던 것일까. 조 전 대사의 한국행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것도 딸을 찾아 평양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아내의 의지였다는 보도가 나온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8일까지 4부작으로 내놓은 ‘증발―사라진 사람들’ 시리즈는 세파에 지쳐 스스로를 격리한 사람들과 가족들의 사연으로 독자들을 울렸다. 조 전 대사 부부는 자유가 없는 나라 북한을 등진 증발 시도였다고 할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딸과 생이별하는 이산의 고통을 마주하게 된 상황인 것 같아 더 안타깝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탈북#이산#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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