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 ‘벌집 아파트’ 시대가 흔들린다[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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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공중보건 위기에 속수무책
도시 주거공간 ‘아파트 시대’ 저물까

박용 경제부 차장
박용 경제부 차장
2주 전 미국 뉴욕 특파원 임기를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왔을 때 거리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3년 전 퇴근길 직장인들과 차량으로 밀리던 오후 8시경 광화문 주변 도심은 주말처럼 한산했다. 꼬리를 물고 가다 서다를 하던 차들이 거리를 씽씽 내달리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해외 입국자 전용 택시의 기사는 “주52시간제 도입 이후 직장인들의 퇴근이 빨라진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까지 터져 거리가 더 한산한 것 같다”고 말했다.

더 기가 막힌 건 이런 경기 침체 속에서도 서울 아파트값은 3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 따르면 3년간 서울 25평 아파트값이 4억5000만 원(53%) 상승했다고 한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정부와 한국은행이 막대한 돈을 풀어 유동자금은 넘쳐나는데 서울에서 아파트만 한 주거 환경과 투자 가치를 갖춘 곳이 별로 없으니 아파트 시장이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것이다. 서울에서 ‘이생집망’(이번 생에 집 사기는 망했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해 아파트에 투자한다는 얘길 들으면서 코로나19 봉쇄령이 내려진 뉴욕시의 아파트에서 지난 석 달간 갇혀 지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3월 코로나19 위기가 본격화되고 뉴욕에 봉쇄령이 내려지자 아파트 주민들이 누리던 헬스장, 루프톱 등 공용 편의시설은 문을 닫았다. 집 밖에 나가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던 식당이나 백화점, 박물관, 극장도 문을 닫았다. 도심 아파트의 장점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평소에 느낄 수 없었던 아파트의 불편함과 고통은 커졌다. 가족들이 학교나 직장을 가는 것을 전제로 좁은 공간을 선택했던 사람들은 가족들과 24시간을 아파트에서 갇혀 지내야 한다는 막막한 현실에 직면했다. 사람들이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층간 소음도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맨해튼의 오래된 아파트 주민들은 집 안에 세탁기가 없어 건물 내 공용 세탁시설이나 동네 빨래방을 이용했다. 바이러스 감염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소형 세탁기를 사서 욕조에 설치했다.

초기 방역에 실패하고 의료시설 포화를 걱정하던 뉴욕시 당국은 시민들에게 코로나19 증상이 있더라도 심각하지 않으면 병원에 오지 말고 집에 머물도록 권했다. 증상이 있건 없건 주민들은 숨넘어갈 정도로 아프지 않으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를 떠날 수 없었다. 집 밖보다 안이 더 위험한 게 아니냐는 아파트 주민들의 걱정도 커졌다.

공중보건 위기에 속수무책인 ‘벌집 아파트’의 한계를 체감한 뉴욕 시민들은 고층 아파트에 ‘영끌’까지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맨해튼에서는 돌을 사둬도 돈이 된다’는 말까지 있었지만 6월 맨해튼에서 거래된 아파트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6% 줄었다. 떠나는 이는 늘어나는데 부동산 거래가 중단돼 빈집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아파트를 찾는 이들은 발코니 등 야외 공간이나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홈 오피스’가 있는 집을 찾는다.

대도시의 빠른 회복력을 감안하면 코로나19 확산이 멈추고 경제 활동이 본격 재개되면 맨해튼 아파트 거래가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다. 다른 한편에서는 코로나19로 재택근무 등이 보편화되는 ‘언택트 시대’에 도심 고층 아파트 인기는 예전만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엇갈린다. 서울 등 세계 대도시의 ‘롤 모델’로 여겨지던 뉴욕 아파트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당분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국 인기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는 히트곡 ‘뉴욕뉴욕’에서 ‘이 도시에서 아침에 눈을 떴으면 좋겠다’고 노래했지만, 돌이켜 보면 코로나19 봉쇄령 속에서 뉴욕 아파트에서 아침을 맞는 일은 설레고 흥분되는 일만은 아니었다.
 
박용 경제부 차장 parky@donga.com
#아파트 시장#벌집 아파트#주거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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