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사가 사라졌다, 젊은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광화문에서/이헌재]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입력 2020-07-23 03:00수정 2020-07-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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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대망의 우승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 마운드에는 고교 최고의 왼손 투수 김진욱(18)이 서 있었다. 하지만 강릉고의 사상 첫 전국대회 우승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진욱이 9회초 마지막 상대 타자에게 공 2개를 던진 뒤 마운드를 내려갔기 때문이다. 결과는 김해고의 4-3 대역전승. 지난달 열린 제74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겸 주말리그 왕중왕전에서 두 팀의 희비를 가른 것은 ‘투구 수 제한’ 규정이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의 투구 수 규정에 따르면 한 경기에서 105개를 던진 투수는 볼 카운트와 관계없이 곧바로 교체해야 한다. 이 규정이 아니었다면 김진욱은 계속 공을 던졌을 것이다. 김진욱으로서도 강릉고로서도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규정이 아니었다면 김진욱은 준결승에서도 8강전에서도 공을 던졌을 것이다. 주말리그에서도, 다른 전국대회에서도 무수한 공을 던졌을 게 분명하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에이스의 ‘혹사’는 ‘투혼’으로 포장되곤 했다. 에이스들은 200개 가까운 공을 던지고, 위기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등판했다. 순간으로는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야구 인생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많은 유망주들이 프로 입단과 함께 수술대에 올랐다. 몇몇은 재기했지만 더 많은 선수들은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야구 인생을 접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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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 수 제한을 비롯한 의무 휴식일 규정(91개 이상 투구 시 4일 이상, 76∼90개 3일, 61∼75개 2일, 46∼60개 1일)이 도입된 것은 2018년부터다. 2016년 말 KBSA 회장에 오른 ‘코끼리’ 김응용 전 감독(79)이 1년여의 준비 끝에 전격적으로 시행했다.

‘혹사’가 사라지자 젊은 선수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고졸 신인인 KT 소형준, 삼성 허윤동, LG 이민호(이상 18세) 등은 올해 선발 투수로 뛰고 있다. 고졸 2년 차로 범위를 넓히면 삼성 원태인, 롯데 서준원(이상 20세) 등이 씩씩하게 공을 던진다. KBO리그에서 ‘영건’들이 이처럼 건강하게 공을 던지는 건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한경진 선수촌병원 재활원장은 “제도 시행이 몇 해 되지 않았지만 고교 투수들의 수술 빈도가 현격히 줄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긍정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예전에는 많은 팀들이 에이스 한 명의 어깨에 의존했다면 지금은 여러 선수가 고루 기회를 제공받는다. 선수도 살고, 팀도 산다. 서울로 몰리던 선수들은 이제는 더 많은 기회를 찾아 지방으로 떠난다. 지방 팀도 살고, 서울 팀도 산다.

여전히 많은 현장 지도자들은 선수가 모자라 팀 운영을 하기 힘들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김 회장의 결단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네 편, 내 편 가리지 않고 야구 발전이라는 원칙 하나만을 따랐기 때문이다.

사심 없는 김 회장은 취임 후 지금까지 월급을 받지 않는다. 회장에게 책정된 판공비도 없다. 어지간한 곳은 손수 운전해서 다닌다. 그는 지금도 틈틈이 아마 선수들에게 개인적으로 장학금을 준다. 선행을 알려야 하지 않느냐는 주변의 제안에 그는 특유의 투박한 어투로 이렇게 답한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야구로 받은 게 얼만데,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지.”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kbo리그#프로야구#투구 수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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