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법치의 힘[오늘과 내일/장택동]

장택동 국제부장 입력 2020-07-03 03:00수정 2020-07-0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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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압 이겨낸 판결로 정권교체 이룬 말라위… 정치권력에서 독립된 법원의 가치 보여줘
장택동 국제부장
서방 국가의 식민통치를 거쳐 독립한 뒤에는 장기 독재를 겪고, 이후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빈곤의 악순환. 여러 아프리카 국가가 경험하고 있는 현대사 스토리다. 아프리카 동남부에 위치한 말라위도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기를 거쳐 1964년 독립한 뒤 30년 동안 헤이스팅스 카무주 반다 전 대통령이 장기 집권했다. 1994년 다당제가 도입된 뒤에도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이어졌다. 1인당 국민소득은 389달러(2018년 세계은행·WB 집계 기준)로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발간하는 ‘월드팩트북’은 “말라위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및 외국에서 지원하는 구호자금에 의존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최근 이 나라에서 세계가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지난달 23일 열린 대통령선거 재선거에서 야당 라자루스 차퀘라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부정선거가 인정돼 재선거가 실시된 것은 2017년 케냐 이후 두 번째이고, 재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해 대통령이 바뀐 것은 아프리카 사상 처음이다.


여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이었던 피터 무타리카가 민주적 절차를 존중한 결과였을까. 물론 아니다. 집권세력의 압박을 이겨낸 사법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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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대선에서 무타리카가 이겼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개표 조작 등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됐다. 몇 달간 시위가 이어졌고, 올 2월 헌법재판소는 선거무효 결정을 내렸다. 이어 5월 앤드루 니렌다 대법원장의 주도 아래 대법원은 헌재의 결정이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궁지에 몰린 무타리카 측은 재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법부를 흔들었다. 투표를 불과 11일 앞둔 지난달 12일 정부는 니렌다 대법원장에게 “572일 동안 휴가를 가라”고 명령했다. 26년간의 공직생활 동안 쌓인 연차휴가를 모두 쓰라고 한 것인데, 니렌다 대법원장은 이 휴가를 다 쓰기 전에 정년퇴임을 맞게 되므로 사실상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아프리카에서 법관들은 위협과 압박, 회유에 종종 마주치고 있기 때문에 니렌다 대법원장이 정권에 투항할 것으로 보였다”고 보도했다. 2017년 케냐에서는 법원이 재선거 일정을 논의하기로 한 전날 법관의 차량이 총격을 당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재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이 승리했고 이후에도 법원에 대한 탄압이 진행됐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하지만 니렌다 대법원장은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같은 이유로 사직 권고를 받았던 에드워드 트웨아 대법관도 역시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법조계와 시민단체, 학계 인사들은 법원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평화로운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선진국에서도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은 중요하다. 미국 대법원은 최근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DACA·다카) 제도 폐지 등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던 정책에 제동을 거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미국 대법관은 보수성향 6명, 진보성향 3명으로 구성돼 있다. 성향대로 판결한다면 보수적 행정부의 정책이 뒤집힐 일이 없겠지만, 일부 보수성향 대법관은 사안에 따라 ‘배신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소신대로 판결을 한다. 이를 통해 행정부의 폭주를 제어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사람이 아니라 법이 통치한다는 법치(法治)다. 이를 위해선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 현실에서 이를 지켜내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그 가치는 더욱 소중하다.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장택동 국제부장 will71@donga.com

#법치#외압#정치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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