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지 마라[동아광장/김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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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모르는 보수, 현 의석도 과분… 지금의 정체성-지지기반 탈피해야
과거 관행 반복하면 미래 희망 없다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총선 다음 날(16일) 내건 미래통합당의 현수막이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후에도 당시 자유한국당은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현수막을 걸었다. 2년 가까이 지났지만 계속 퇴보한다. 쪼그라든 당권을 두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 보수 정당은 천천히 멸종할 것 같다. 마음 좋은 유권자는 숨통을 끊는 대신 숨 쉴 공간을 남겨주길 반복하지만, 이제 그 선의도 의미 없다.

진보의 압승, 보수의 궤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지난 몇 년간 행적을 보면 100여 석이라도 건진 게 대박으로 보인다. 가깝게는 공천 과정에서의 몰염치와 추태, 후보자의 막말, 멀게는 탄핵당한 정권의 총리를 대표로 세워 재건의 노력을 초기화시킨 것. 총선 결과가 과분해 보이는 이유는 많다. 선거에서 내리 패배한 보수의 문제가 한 번의 공천 실패나 단기적 선거 전략의 부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 조직의 체질적 한계와 보수 이념의 유효 기간 만료 같은 근본적 지점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신뢰를 상실한 보수의 몰락을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수준에서 진단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가능할까?

우선 세 가지만 버려 보자. 모호한 정체성부터 버려야 한다. 박정희 정권과 군부 잔재에 3당 합당이라는 정치적 시민권의 세례를 주며 출발한 보수 정당은 뚜렷한 정책적 기반 없이 합종연횡으로 주도권만 번갈아 쥐며 30년을 그럭저럭 버텨왔다. 하지만 최근 유권자의 선택은 보수 정당이 산업화 시대에 어울릴 입장만을 고수하는 한 멸종 말고는 대안이 없음을 보여준다. 수명이 다한 이념적 정체성에 기생해 한 줌 남은 권력을 지키려 한다면 그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합리적 보수, 따뜻한 보수 따위로 위장해 유권자를 기만하지 말고 일단 듣는 능력부터 키웠으면 좋겠다. 군림하느라 만나본 적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빌기라도 해서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라.

여의도 정치를 버려야 한다. 보수 정당은 국회로 찾아오는 절박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권한으로 세상을 움직인다고 착각하면서 여의도에서만 이기려는 이익단체가 되고 말았다. 여의도에서 구차한 희망이라도 발견하려는 사람들조차 보수 야당이 보유한 의석은 분에 넘치는 권력이었음을 잘 안다. 여전히 여의도 정치에 갇혀 있을 몇몇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잘한다는 이를 주변에서 찾을 수 없고 실책뿐이라는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위선에 대한 공분도 최근 일인데, 왜 자신들이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소수에 둘러싸여 민심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심이 없었던 거다. 유권자의 상식에는 탄핵으로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은 이전 정권의 주역이 부활해 조 전 장관을 비판하며 ‘정의의 사도’가 된 양 설치는 게 더 어색하다. 김재원 통합당 의원이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을 두고 나라 살림을 걱정하는 모습이 더 기괴하다. 여의도에 당신들 자리는 없다. 여의도를 포기해라. 유권자 선택을 받은 여당이 있으니 여의도는 걱정하지 마라.

전통적 지지기반을 버리자. 보수 정당의 지지기반은 1960년대 이전 출생자, 북한을 주적으로 판단하는 집단, 서울의 가장 잘사는 동네와 영남이다. 보수 언론도 이론적 지지기반이다. 이들을 외면하자는 게 아니다. 특정 집단의 극단적 견해가 대한민국의 성장에 땀과 눈물을 바친 다수 의견인지 진중하게 접근하라는 말이다. 아스팔트 위에서, 유튜브에서 흘러 다니는 소문에 휘둘리는 리더십으로 유권자를 설득할 수 없다. 전통적 지지기반을 버리라는 것은 당내에 만연한 이념적, 정책적, 실천적 게으름을 버리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다양한 세대와 집단의 서로 다른 견해와 직접 부딪치면서 작은 것부터 실천해 신뢰를 쌓고 보수의 진짜 담론을 만들자. 그 시작을 전통적 지지기반의 전형적 입장을 거스르는 것에서 하자.

보수 정당은 재건을 모색하는 모양이다. 김종인 씨는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하며 ‘1970년대생 경제통’을 대선 후보로 만들겠단다. 하지만 이 정도 문제의식으로 여러 번 접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보수 정당을 올곧게 펼쳐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나이가 많아서, 경제를 몰라서 외면당하는 게 아니다. 유권자에게 경제적으로 조금 더 잘살 수 있겠다는 기대를 주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낡았다. 자신이 처한 위기의 근본적 지점이 보이지 않고 관행을 반복하는 게 최선으로 여겨진다면, 다 내려놓고 퇴장하는 게 맞다. 뛰는 국민 발 걸지 말고 계속 주저앉아 있어라. 다시 시작하지 마라.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총선#보수 정당#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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