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알리려는 입에 재갈… ‘사실적시 명예훼손’ 부작용[광화문에서/김재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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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사회부 차장
김재영 사회부 차장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내 성폭행’ 사건 가해자가 이달 5일 1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직장 내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촉발시킨 사건이었다.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린 지 거의 2년 만에 피해자는 다시 웃을 수 있게 됐다.

신입사원이던 A 씨는 2017년 1월 회식 후 교육담당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경찰에 신고하고 회사에도 알렸지만 회사는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다. 그해 10월 A 씨는 용기를 내 인터넷에 글을 올려 폭로했다. 지지와 응원도 많았지만 한편으론 ‘꽃뱀’이라는 수군거림도 견뎌야 했다. 가해자는 오히려 A 씨를 명예훼손과 무고로 고소하며 압박했다. 판결이 나오기까지 A 씨는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야 했다.

단지 진실을 밝히려 한 고발인에게 세상은 ‘명예훼손’이라는 협박으로 응수한다.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회사의 ‘갑질’을 제보한 직원, 임금 체불을 피켓 시위로 알린 근로자, 건물주의 횡포를 토로한 세입자 등도 비슷한 일을 겪는다. 진실을 알리는 것이 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법 제307조 1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진실을 적시해도 처벌할 수 있기 때문에 고소하는 자는 허위 사실임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런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는 형법 조항도 있지만 고소 자체를 막을 순 없다. 법정이 낯선 일반인들은 고소하겠다는 얘기만으로도 주눅이 든다. 이 때문에 폭로를 조기에 잠재우기 위해 가해자들이 명예훼손으로 위협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 대한변호사협회와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실은 심포지엄을 열고 이 조항의 폐지 여부에 대해 논의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한다고 주장했다. 김성돈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진실을 발설하기로 마음먹는 시민이 심각한 내적 갈등에 빠지게 한다”며 “시민들은 학습효과를 통해 엄격한 자기검열 장치를 작동시킨다”고 말했다.

반면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성범죄 피해 전력, 동성애 등 성적 정체성, 이혼, 가족관계 등 사생활이 공개돼 기본권이 침해될 위험성이 작지 않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 퍼지면 피해를 회복할 수 없다는 점도 문제로 들었다.

하지만 사실을 적시했다고 처벌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 일본 등 손에 꼽을 정도다. 미국은 명예훼손은 대부분 민사적 방법으로 해결한다. 독일, 프랑스 등은 명예훼손 처벌 규정이 있지만 내용이 사실인 경우 처벌하지 않는다. 사생활 침해가 문제가 된다면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을 폐지하되 사생활 보호를 위한 별도 입법을 마련하면 될 일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동화는 그리스 신화, 페르시아 신화, 삼국유사 경문왕 설화 등 다양한 버전이 있다. 조금씩 다르지만 결론엔 공통점이 있다. 사실을 퍼뜨린 이발사(또는 복두장인)는 처벌받지 않았다. 진실을 말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
 
김재영 사회부 차장 redfoot@donga.com
#사실적시 명예훼손#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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