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고미석]인장의 추억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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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갓’이 주목의 대상이다. 넷플릭스의 첫 오리지널 한국드라마 ‘킹덤’에 소품으로 등장한 조선시대의 전통 모자에 외국 시청자들이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이베이 아마존 같은 인터넷 쇼핑몰에도 갓이 올라 있다. 사극이라면 모를까 일상에서 자취를 감춘 옛 선비의 필수품이 21세기 서구인들에게 ‘진짜 멋진 모자’로 재발견된 셈이다.

▷정작 본고장에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새로운 가치와 용도를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데 생활필수품 중 하나였던 인장의 운명도 그렇다. 중장년 세대라면 초등학교 시절 생애 첫 통장을 만들 때, 입시원서를 제출할 때, 예금통장을 개설할 때 등 인생의 중요한 길목마다 으레 인장을 사용했기에 보통 몇 개씩 도장을 갖고 있다. 지금은 이런 업무가 대부분 서명으로 대체되는 추세여서 도장을 쓴 기억조차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인감만이 실물 도장으로서의 존재감을 외로이 지켜가고 있다.

▷용처가 줄면서 외면받았던 인장이 요즘 외국인 대상 선물로 관심을 받고 있다. 우리 식의 인장문화가 낯선 외국인들은 자기 이름을 새겨준 한글 도장을 색다르고 의미 있는 선물로 선호한다고 한다. 얼마 전 미국 국무부의 한국과 직원들이 공동 명의로 조윤제 주미 대사에게 한글 도장을 찍은 손편지를 보냈다. 조 대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한 편지에는 지난달 관저 오찬에 초청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와 더불어 숀, 클레어, 스캇, 엘리슨, 클라라, 줄리, 쌤 등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14개의 한글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오찬 당시 직원들에게 한글 도장을 선물하자 답례로 도장을 찍은 손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영문 손편지에 찍힌 여러 개의 한글 인장은 얼핏 동양의 오래된 풍류를 떠올리게 한다.

▷옛 서화의 여백을 보면 여러 사람의 인장이 빽빽이 담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글과 그림을 쓴 작가뿐 아니라 감상자와 소장자도 자신들의 인장을 남긴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모든 인장이 감상의 대상이자 작품 속의 작품으로 서화의 가치를 높여준다. 요즘 한국의 인장문화는 예전의 엄숙한 표정에서 벗어나고 있다. 실용적 기능을 잃은 반면, 한껏 멋을 낸 한글 인장으로 신세대와 외국인들 사이에서 새롭게 설 자리를 찾는 중이다. 무엇보다 여전히 많은 한국인은 인장에 얽힌 저마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생애 최초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날, 평생토록 그 순간의 설렘과 감격을 되살려주는 소중한 인연이 바로 인감도장이기 때문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갓#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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