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녕의 오늘과 내일]청와대 안의 異心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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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박상은 의원,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 천신일 전 세중나모 회장, 홍사덕 전 의원, 현영희 전 의원의 공통점은? 검은돈 거래 등과 관련해 자신이 부리던 운전기사의 신고나 진술로 뒤통수를 맞은 사람들이다. 사연이 제각각이라 일률적으로 어느 쪽의 잘못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주인이 오죽 못났으면 수하 사람한테 배신을 당했겠냐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운전기사들의 행위를 의협심이나 정의감의 발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반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주인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비밀 보장을 직분으로 삼아야 할 사람이 거꾸로 주인을 곤경에 빠뜨렸다면 적어도 직업윤리 측면에서는 박수만 치기는 어렵다. 사욕을 챙기려고 그랬다면 더욱 그렇다.

1997년 대통령선거를 한 달가량 앞둔 11월의 일이다. 훗날 김대중(DJ) 정부에서 일했던 핵심 관계자가 대선 후보인 DJ에게 현안을 보고하기 위해 서울 동교동 자택 뒤의 안가에 갔을 때 엄익준 씨가 두툼한 서류봉투를 들고 동향인 새정치국민회의 중진과 함께 황급히 나왔다고 한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 때였고, 엄 씨는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3차장이었다. DJ의 대선 승리 후 엄 씨는 국정원을 좌지우지하는 실세가 됐다. 2005년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발간한 ‘김대중 정권의 흥망’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국가정보기관의 고위 간부가 대선을 코앞에 두고 야당 후보를 몰래 만났다면 뻔할 뻔자다. 당시 이 일이 알려졌다면 아마 난리가 났을 것이다. 국정원 직원의 정치 개입이니, 선거 중립 위반이니 하는 법적인 문제를 거론하려는 게 아니다. 국가정보를 다루는 사람이 사사로운 욕심에서 정보를 판 것이라면 공직에 대한 배신행위나 다름없다.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얼마 전 청와대 직원들이 참석한 시무식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이심(異心)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심은 맡은 일이나 직책에 충실하지 않고 딴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청와대 문건을 허위로 만들고 유출시킨 혐의를 받고 있는 박관천 전 행정관과 이에 연루된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검찰은 두 사람의 행위에 대해 “박지만을 이용해 자신들의 역할 또는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추단된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원래부터 공무원인 ‘늘공’과 어쩌다 공무원이 된 ‘어공’이 어울려 근무하는 특수한 곳이다. 이들은 길어봤자 5년간 한시적으로 머물 뿐이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곳이니 모두들 자부심과 사명감,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을 것이란 인상을 갖는다. 그러나 근무 경험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실상은 다르다.

예전엔 청와대 근무가 영광이나 출세로 인식됐다. 늘공은 원래 부처로 돌아가면 승진의 우대를 받았고, 어공은 공천을 받아 정계에 진출하거나 공기업 등에 한 자리를 챙겨 나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그런 ‘특혜’도 줄어드는 추세다. 늘공이야 그나마 돌아갈 곳이라도 있지만 어공은 변호사 같은 특수 신분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스스로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 아무리 열정과 희생을 강조한들 자연스럽게 움트는 이심을 어쩔 수 없다.

문제는 이 같은 생계형 이심이 아니라 권력과 정보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탐욕형 이심이다. 힘이 세고 정보가 집중되는 곳일수록 이런 이심을 갖는 자들이 생겨나기 쉽다. 잠재적 후환덩어리다. 김 실장이 말로만 ‘이심 경계령’을 내릴 것이 아니라 차제에 못된 이심을 가진 자가 없는지 구석구석 살펴 조치하는 대대적인 쇄신에 나서야 한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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