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광복 70년, 통일 한국 향한 재도약의 갈림길에 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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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식민지의 시인 이육사는 1945년 발표된 유고 시 ‘광야’를 중국 베이징 감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구상했다. ‘눈 나리고 매화 향기 아득해’ 누구도 해방을 예상하지 못했던 시절,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 시인과 부모 세대가 있어 우리는 오늘 광복 70주년의 첫날 아침을 맞았다.

일제강점기 35년에 해당하는 세월이 두 번이나 지나갔다. 우리처럼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終戰)과 동시에 분단된 독일은 45년 만인 1990년 재통일을 이루고 올해에는 재통일 25주년을 맞는다. 30년 뒤면 광복 100주년이 된다. 그 이전에 대한민국은 세계사를 주도하는 선진국이 되어 통일 한반도의 번영을 누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분단 상태 그대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전철을 밟다가 다시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기다릴 것인가.

북한과 일본에 손 내미는 ‘창조외교’를

우리에게도 분단 70년을 극복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김정일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비롯해 6·25전쟁 이후 통일을 앞당길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에서 시작해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퍼 주기 식 햇볕정책의 결과 우리는 북한 독재 체제의 연명을 도우면서 북핵과 미사일 위기를 맞았다. 기회를 흘려보내니 오히려 위기가 닥쳤다.

독일 태생의 미국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가 통찰했듯 독재는 자기 파괴의 요소를 스스로 배양한다. 북한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극심한 군사적 가분수 사회다. 이런 사회는 자기 힘으로 존속할 수 없다. 김정은은 지난해 말 아버지 김정일에 대한 3년 탈상을 계기로 외부 지원을 얻기 위해 대화 국면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북한에 대한 지원은 북한 주민의 인권 신장과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지난해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 대박’을 말하고도 남북 관계에서 진전을 보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대결과 갈등의 분단 70년을 마감하고 신뢰와 변화로 북한을 이끌어 내 통일의 길을 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핵 없는 한반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북의 도발에는 강하게 대처하되 대화와 교류 협력에는 과감하게 손을 맞잡아야 한다.

광복 100년을 분단된 상태로 맞지 않으려면 미국과 중국의 협조를 얻어 내고 중국 일본과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 필수다. 그러나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가 ‘2015년 세계대전망(The World in 2015)’에서 ‘새해 각국은 민족주의로 회귀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처럼 세계적인 흐름은 동북아시아에 먹구름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총생산(GDP)에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라 아편전쟁 이전 중화(中華)의 지위를 회복했다. ‘신형 대국관계’를 내세우며 미국과 군사적 관계를 재설정하려는 기세가 맹렬하다. 미국이 일본을 앞세워 중국을 견제하는 가운데 한국은 일본에서 멀어지고 중국에 접근하면서 세력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반일(反日) 감정, 일본의 혐한(嫌韓)·혐중(嫌中) 분위기에는 맹목적 국수주의의 기운까지 느껴진다.

50년 전 한국 정부는 오로지 국익을 위해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냉온탕을 오가던 한일 관계는 지금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다. 개인 관계에서도 그렇듯이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도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관계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 그럼에도 언제까지 과거사에 발목이 잡혀 현재와 미래의 실익을 포기할 순 없다. 위안부 교과서 등 과거사 문제와, 안보 경제 등 실리적 문제를 분리 대응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다. 한일 정상회담을 포함해 한중일, 한미일 정상회담 등을 통해 일본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는 올해, 성숙한 ‘창조 외교’로 한일 관계를 재정상화할 책임이 박 대통령에게 있다.

새해 박 대통령은 집권 3년 차를 맞는다. 대통령 임기 중 올해는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유일한 해다. 내년에는 총선이 있고 후년이면 벌써 대통령 선거가 기다리고 있다. 2015년은 박 대통령이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경제 체질을 개혁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나라를 바꾸려면 박 대통령 자신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 정윤회 문건은 검찰 조사 결과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럼에도 국민 다수는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고 있다. 국민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인사가 계속된다면 대통령에 대한 불신은 더 커질 것이다. 저녁에는 보고서만 읽고 있지 말고 각계의 현명한 인사들을 만나 귀를 기울이라. 한 걸음 물러나서, 한 단계 높은 데서 봐야 길이 보이는 법이다.

올해도 세계는 민주주의와 정치 엘리트에 대한 회의, 포퓰리즘의 발호로 어지러울 듯하다. 엄중한 상황 속에서 한국이 앞서가려면 무엇보다 절박한 것이 국가 개혁이다. 대통령을 포함해 국가라는 공조직을 사유화하는 공직자는 국가의 암적 존재일 뿐 아니라 역사의 중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올해 독립 50주년을 맞는 작지만 강하고 효율적인 나라 싱가포르에서 배울 바가 많다. 공직 사회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작업과 함께 국민이 내는 혈세를 그들이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세금 개혁, 재정 개혁이 필요하다. 올해 창간 95주년을 맞는 동아일보는 2015년 더이상 국민의 세금이 새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는 연중 캠페인을 벌여나갈 예정이다.

천민 자본주의-낡은 이념 극복해 국격 높여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100개가 넘는 독립 국가가 새로 생겨났지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한국은 그동안 삼성 스마트폰 등 첨단 정보기술(IT)과, 케이팝 드라마 등 한류(韓流)에 힘입어 선진국 문턱까지 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지난해 분위기가 변했다. 세월호 참사와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적 모습이 세계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재계는 시장경제를 지키고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올리기 위해서도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제 살을 깎는 구조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올해 세계 경제는 2014년보다 약간 빠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달러 강세와 유가 하락, 디플레이션 공포는 모든 나라가 맞고 있는 현실이지만 그중에서도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라는 공통적으로 정쟁과 규제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 우리 경제는 특히 ‘정치 리스크’가 크다. 낡은 수구좌파 이념, 지긋지긋한 정파 갈등이 혁신과 개혁, 젊은 세대의 꿈과 미래를 가로막는 구태가 더는 없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과 같은 장기 불황을 피해 선진국으로, 통일 한국으로 하루라도 빠르게 다가갈 수 있다.

광복 이후 70년은 긴 세월이다. 조선 왕조는 개국 70년에 세종대의 전성기를 넘어 성종대의 두 번째 전성기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분단 상황은 우리 민족의 온전한 자기실현을 가로막고 있다. 밤 시간에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본 한반도의 북쪽은 깜깜한 어둠 속에 갇혀 있다. 늦어도 광복 100년이 되기 전까지는 민족과 국토의 분단을 극복하고 한반도 전체에 골고루 빛이 넘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올해가 그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광복 70년#일제강점기#한류#천민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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