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여의도 신뢰프로세스

  • 동아일보

박성원 정치부장
박성원 정치부장
“신뢰는 서로 대화하고 약속을 지키며 교류·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축적될 수 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21일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축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해설 책자 발간에 맞춘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오늘 판문점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간 실무회담이 열리는 것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대화의 끈을 놓지 않은 박근혜 대통령의 성과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체제와 이념이 다른 남북 간에도 작동 가능성이 엿보이는 신뢰프로세스가 여의도 정치권에는 먹혀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국정조사는 오늘로 만료되지만 민주당은 장외투쟁을 마무리하기는커녕 천막투쟁의 강도를 높이고 오히려 장기전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국정조사 마무리 이후 예상되던 박 대통령과 여야 대표 간의 3자 회동도 멀어지는 분위기다.

그제 민주당의 국정조사특위 소속 의원들은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4·19혁명을 촉발시킨 1960년 3·15부정선거를 거론하며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야권 내부에서 꿈틀대는 대선 불복의 속내를 드러내며 대통령을 겁박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마당에 양자든, 3자든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회동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민주당이 ‘남해박사’(남재준 국가정보원장 해임과 박 대통령의 사과) 요구를 고수하는 상황에서 야당과 대통령이 만나 얼굴 붉히고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 국민만 피곤할 것이라는 청와대의 손사래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다.

이처럼 만날 수 없는 이유를 대자면 10가지도 넘겠지만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나야 하는 이유를 꼽자면 그보다 몇 곱절은 많을 것이다. 당장 1일부터 박근혜 정부 들어 첫 정기국회가 시작된다. 박 대통령의 복지 공약 이행과 이를 위한 재원 조달 방안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고 그에 바탕을 둔 세제개편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치솟는 전월세 대책과 청년일자리 창출, 경제활성화 등 민생 정책 입법도 야당과의 협의 없이 여당만으로는 방망이를 두드릴 수 없다. 개정 국회법(국회선진화법)상 의석수가 3분의 2를 넘지 않는 한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에도 지난해 결산심사와 새해 예산안 심사, 국정감사 등의 일정이 줄줄이 기다리는 국회에 들어가 정부 여당의 정책 실패를 파헤치고 ‘실속’을 챙겨야 한다는 의원이 적지 않다. 친노 강경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원내복귀 반대론이 거센 속에서 협상과 타협을 중시하는 의회론자인 김한길 대표와 전병헌 원내대표에게 명분을 주고 국정 운영의 실리를 챙겨야 하는 것은 집권세력의 책무이다.

민주당 소속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5월 공화당 의원 2명을 포함한 상원의원 3명과 골프회동을 하며 소통 행보를 했다. 과거 테니스를 즐겼던 박 대통령도 김한길 대표를 초청해 함께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국민의 정신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야당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다면 민주당이 대선 패배에 일부라도 작용했다는 억울함을 갖고 있는 국가정보원의 개혁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히 응답하는 게 승자의 도리일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선거 개입을 의심받고 있는 국정원에 맡긴 ‘셀프개혁’은 설득력이 약하다. 민주당의 요구처럼 국회에 국정원 개혁특위를 만드는 방안은 국가정보기관의 속살을 만방에 노출시킬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대안으로 여야가 동의하는 전문가들로 초정파적인 위원회를 구성해 보안을 유지하면서 검토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 철군을 둘러싸고 국론이 갈라졌던 조지 W 부시 정부 시절 미국이 의회 산하에 구성했던 ‘이라크 스터디그룹(ISG)’을 참고할 수도 있다. 마음만 있다면 여의도의 닫힌 문을 여는 게 생떼로 중무장한 북한과의 대화 문을 여는 것보다야 어렵겠는가.

박성원 정치부장 swpark@donga.com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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