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손택균]맛집의 허상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2일 03시 00분


손택균 문화부 기자
손택균 문화부 기자
친구가 일본 도쿄로 한동안 파견근무를 나갔다. 몇 차례 휴가 때 긴자 부근의 그 친구 집에 잠자리를 얻고 저녁밥과 술을 샀다. 일본어에 그럭저럭 능숙한 녀석 덕분에 메뉴판에 영어 설명이 없는 자그마한 골목 식당과 술집을 주로 다녔다.

하루 판매량을 정해 놓고 돈가스와 맥주만 파는 가게. 식당 복판의 널찍한 직사각형 주방에 백발 요리사 4명이 젊은 보조를 한 명씩 데리고 띄엄띄엄 서 있었다. 첫 번째 요리사는 줄곧 고기만 잘라 손질했다. 두 번째 요리사는 연신 빵가루를 갈아내 넘겨받은 고깃덩이에 계란 반죽과 함께 묻혔다. 세 번째는 묵묵히 튀기고, 튀기고, 튀겼다. 네 번째의 몫은 양배추 썰기. 공장 컨베이어 벨트 위 제품처럼 돈가스 접시들이 척척 재단돼 나왔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같은 음식이라도 날마다 맛이 다르다. 주문이 접수된 뒤 상에 올라 삼켜질 때까지 허다한 변수가 작용한다. 주방장의 컨디션, 날씨, 아침에 들어온 재료의 선도, 그릇 설거지 상태, 손님의 신체 리듬과 심리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진다.

2인 1조로 오로지 하나의 작업에 집중하도록 한 긴자 돈가스 집의 분업은 조리 과정의 변수를 최소화한 시스템이다. 주방을 빙 둘러싸고 앉은 손님들은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눈요기를 하면서 모든 조리 과정을 감시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값비싼 산해진미만 맛난 게 아니다. 달걀 하나를 삶아도 맛있게 또는 맛없게 삶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레시피는 하나다.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거기서 모든 게 결정 난다.

서울 세종로 부근에는 ‘맛집’으로 알려진 음식점이 꽤 많다. 하지만 그곳 직장인들은 점심시간마다 고민한다. 뭐 좀 맛있는 거 없을까? 답은 거의 늘 “그냥 대충 때우자”다. 맛집 동네에 왜 맛있는 점심은 드문 걸까. 이 동네에는 ‘맛없는 맛집’을 보호하는 두 가지 방어막이 있다.

첫 번째 방어막은 손님의 체면이다. 고깃집이든 레스토랑이든 세종로 근처 식당에서는 “처음 뵙습니다”라며 명함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일 때문에 만난 자리에서 “맛이 형편없는데 주방장 좀 봅시다”라고 할 사람은 없다. “가격에 비해 음식이 너무 부실하다”고 항의하기도 어렵다. 맛없는 음식을 비싸게 내놓아도 군말 없이 계산하고 나가는 손님이 대부분이므로 음식을 굳이 맛있게 만들 필요가 없다.

두 번째는 ‘레밍 효과’다. 북유럽에 무리 지어 서식하는 들쥐 레밍은 눈이 어두워 바로 앞 동료 꽁무니만 따라다닌다. 그러다 보니 선두의 실수로 호수나 바다에 줄줄이 뛰어들어 ‘집단 자살’하는 웃지 못할 광경이 가끔 벌어진다. 점심때마다 스무 명쯤 길게 줄을 늘어서는 파스타 집. 재료와 솜씨에 어울리지 않는 가격이라 두 번 가 보고 다시는 찾지 않는다. 하지만 가게 앞의 줄은 여전하다. 소문이 자자하다기에 찾아왔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솔직하게 “헛소문이었구나. 맛없네”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
#맛집#레밍 효과#체면#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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