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경준]일하고 싶은 기업의 조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0일 03시 00분


정경준 산업부 차장
정경준 산업부 차장
나도 갑(甲), 그것도 슈퍼 갑이었던 때가 있었다. 금세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2010년 동아일보 수습기자를 뽑을 때다. 5일 동안 실무평가를 진행하며 잘난 척, 착한 척하는 지원자들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중책을 맡았다. 내 판단 하나가 지원자의 운명을 가를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지만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이들을 지켜보며 마치 내가 지원자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것처럼 느꼈다.

미망(迷妄)에서 벗어난 것은 한 탈락자의 e메일을 받고서였다. 내용은 이랬다.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동아일보와 함께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선배는 우리를 관찰하셨지만 저도 동아일보를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과연 내가 일하고 싶은 회사인지. 젊음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패기 있는 인재를 놓친 게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이 지원자가 동아일보의 어떤 점을 눈여겨봤을지 궁금증이 일었다. 급여 수준? 안정성? 자아실현의 기회? 아니면 최고 신문사 기자라는 타이틀?

취업포털 인크루트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최근 동아일보가 분석 보도한 ‘2013 일하고 싶은 기업’은 이런 의문에 몇 가지 힌트를 준다. 대학생들이 직장을 고르는 기준이 돈에서 즐거움, 자부심 등 정서적인 쪽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강세였던 ‘만족스러운 급여, 투명하고 공평한 보상’은 10가지 기준 가운데 5위에 그친 대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문화’ ‘우수한 복리후생’ ‘구성원으로서의 자부심’이 상위권에 올랐다.

경영학에서는 이를 ‘스트레스’로 설명한다. 스트레스는 과도하게 많아도 문제이지만 너무 적어도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기타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면 끊어지기 쉽고 형편없이 느슨하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처럼 최고의 성과를 내려면 적절한 스트레스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문화나 우수한 복리후생은 과도한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번 아웃(burn out·소진)되는 비극을 막아준다. 반면 농업적 근면성에서 비롯한 초과근무, 야근은 반대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밤에도, 주말에도 남아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헌신적인 직원으로 인정받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이를 깨뜨려야 할 사람은 최고경영자(CEO)다.

‘초과근무 제로(0)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구자영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좀처럼 야근이 줄지 않자 이달부터는 야근을 하려면 먼저 승인을 받도록 했다. LG전자의 조성진 HA사업본부장(사장)도 매주 수요일을 ‘패밀리 데이’로 정해 오후 5시면 퇴근하게 하고 직접 안내방송을 하며 정시 퇴근을 독려하고 있다.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일부 공기업이거나 세계 초일류 기업을 꿈꾸는 곳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리더는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과제를 던져야 한다. 그래야 자부심이 생겨난다. 헨리 포드는 값싼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해 말과 마차에 의존하던 인류의 교통시스템을 바꾸겠다는 비전, 스티브 잡스는 값싼 컴퓨터로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비전으로 구성원들의 열정과 자부심을 이끌어냈다.

이번 조사에서 대학생들은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으로 삼성전자를 꼽았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다. 과연 그럴까. 2020년을 향한 삼성전자의 공식 비전은 ‘Inspire the World, Create the Future(세상에 영감을 주고, 미래를 창조하자)’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구성원들은 아직도 20년 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먼저 떠올린다.

지금까지 채용시장에서 절대 갑으로 행세하던 기업들은 이제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유능한 인재들의 ‘간택’을 받을 수 없다.

정경준 산업부 차장 news91@donga.com
#갑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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