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전 4·11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이 패배하자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반응이 많았다. 총선을 앞둔 객관적 정세는 야권에 유리했다. 이명박 정권 측근 실세들의 비리 시리즈로 정권 심판론이 거셌다. 변신한 새누리당에 맞서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로 맞불을 놓았다. 민주당 전략가들은 총선 승리에 이어 대통령선거 승리를 기정사실화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총선 패배의 후폭풍은 거셌다. 선거 패인(敗因)을 놓고 수백 가지의 그럴듯한 분석이 줄을 이었다. 당을 장악한 친노(親盧) 지도부의 패권주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김용민의 막말, 야권연대의 종북 시비…. 그러나 분석은 말로만 그쳤다. 친노 주류는 쇄신 카드 대신에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 담합 카드를 띄웠다. 친노와 호남 세력을 묶어 당권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자기 살을 도려내는 쇄신 요구에 맞서 권력투쟁으로 판을 바꾸려는 노림수가 번득였다. 총선 후 2개월이 지난 6·9 전당대회에서 친노의 좌장인 이해찬 대표 체제가 들어섰고, 9월 16일 친노 문재인이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친노의 변화와 쇄신은 빈말에 그쳤다.
18대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문재인은 박근혜에게 졌다. 야권 인사들은 또다시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고 입을 모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정권교체 요구가 60% 정도로 높았고, 야권에선 안철수 변수라는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문재인 단일후보로 정리됐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한탄은 8개월 전에 나왔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온 것 같다.
대선 패인도 친노 패권주의와 ‘나꼼수’의 네거티브, 종북 시비 등으로 총선 패배 직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안철수와의 단일화에만 매달리면서 문재인만의 목소리나 비전은 실종됐다. 민주당이 총선 때 통진당과 야권연대에만 집착하느라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에 제동을 거는 자기모순을 드러낸 장면과 비슷했다.
문재인은 대선 패배로 혼란스러운 당을 수습하기 위해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명하려다 벽에 부닥쳤다. 법적 문제를 떠나 문재인은 패장(敗將)이다. 패장은 조용히 물러나는 게 도리인데도 논란이 불을 보듯 뻔한 비대위원장 지명권을 왜 행사하려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친노가 마지막까지 알량한 당권을 행사할 작정이었다면 대선 민의를 한참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친노 스스로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자숙할 때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기회가 주류와 비주류가 바뀌는 당권 교체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친노가 사라진 자리를 또 다른 ‘완장부대’가 꿰찰 수도 있다. 대선 민심은 민주당의 1980년대식 낡은 ‘서클 정치’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민주당은 다 이긴다고 장담했던 4월 총선에서 지고도 패인을 진단하는 진솔한 백서(白書)를 내지 않았다. 친노 지도부는 자신에게 쏠릴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번 대선도 또다시 어물쩍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민주당은 이제부터라도 대선 패배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공론의 장(場)을 열어야 한다. 백서는 그 지난한 진통의 첫걸음이 돼야 한다. 민주당이 백서를 내면서 이번 대선 패배의 시작과 끝을 따져보지도 않는다면 문재인을 찍은 1469만 표에 담긴 국민의 뜻을 외면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설픈 계파의 유불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민주당이 백서를 통해 대국민 반성문을 발표한다면 뼈를 깎는 쇄신이 이어져야 한다. 반성 없는 진보는 미래가 없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