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형삼]승자 없는 ‘정당 양극화’

  • 동아일보

이형삼 논설위원
이형삼 논설위원
내일까지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고받겠지만 날이 새고 당선자가 드러나면 한국의 정당정치는 한층 성숙해질 것이다. 대선을 치르며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정책 간극은 얼핏 봐선 분간하기 힘들 만큼 좁혀졌다. 핵심 공약인 정치쇄신 경제민주화 복지확대의 각론 차이는 여야라기보다 당내(黨內) 이견 수준이다. 다음 총선이 3년 이상 남았으니 여야는 당분간 숨고르기에 들어갈 것이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야당은 100석만 모으면 의사(議事) 진행을 막을 수 있다. 그러니 154석, 127석을 가진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누가 대권을 잡든 야당과 상생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제 국회에서 해머와 전기톱이 등장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런 기대가 크겠지만 정치학자들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정책 차이가 적어서 오히려 상대에게 이분법적 이념 색깔을 덧씌우며 극한으로 충돌할 우려가 크다.”(임성호 경희대 교수) “대결의 정치가 계속되는 건 정책 차이 때문이 아니라 타협에 서투른 미성숙한 정치문화 탓이다.”(장훈 중앙대 교수) “19대 국회의 여야 간 이념성향 편차가 18대보다 큰 것으로 조사됐다. 대선 과정에서 중도화 득표 전략으로 미봉된 이념갈등이 선거 후 한꺼번에 분출될 수 있다.”(이현출 한국정당학회장)

정책보다 선거 승리 자체가 목적인 선거전문가 정당, 시민의 생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페이퍼 정당, 모든 계층의 지지를 추구함으로써 어떤 계층의 이해도 반영하지 않는 무색무취의 포괄 정당.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국 정당의 속성을 이렇게 요약했다. 정당들의 이념적 기반이 비슷하다 보니 내용도 없이 감정을 자극하고 적대적 열정을 동원하는 것 말고는 차별화 소재가 없다고 비판했다.

10년이 지난 오늘도 달라진 건 없다. 비전도 콘텐츠도 부실한 양대 정당이 ‘묻지 마’ 관객동원 경쟁을 벌이면서 공허한 감정싸움이 가열됐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정부가 다 책임지겠다고 못 지킬 약속을 쏟아낸 터다. 정책 대결이 실종된 양당의 경쟁은 견제와 균형 대신 감정싸움이 앞서는 소모적 양극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2000년 미국 민주당 앨 고어 대선후보의 러닝메이트였던 조지프 리버먼 상원의원이 지난주 은퇴했다. 그는 “정당의 양극화가 원칙 있는 타협을 가로막고 있다”며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초당적 정책 조율을 당부했다. 리버먼은 명연설로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을 막아냈고 동성애자 군복무 허용 법안을 주도했으나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다. 당론에 맞선 소신 행동으로 민주당 표밭인 지역구 예비선거에서 밀려났다.

미국은 지난 세기에 이미 주요 정치 어젠다를 확립했고 9·11테러를 계기로 대외정책에서도 여야의 지향점이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민주당과 공화당의 정치적 동질화로 반목의 골은 더 깊어졌다. 굵직한 정책보다 성(性) 정체성이나 종교관, 도덕성 같은 감정적 요소들을 정치적 논쟁거리로 삼기 때문이다. 민주당 출신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몰아붙일 때 보수적 민주당원보다 진보적 공화당원의 성원이 더 컸다는 건 이제 전설 같은 얘기다.

대선이 끝나면 잔뜩 부풀린 복지 공약의 실행과 우선순위 설정을 놓고 계층과 집단의 이해관계가 맞부딪칠 것이다. 정치인들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탈(脫)산업사회는 계층 정체성이 흐릿하고 계층 간 이동도 활발하다. 감성적으로 어느 한 계층을 대변하려다간 무익한 이념논쟁에 빠질 수 있다. 구체적인 정책 하나하나를 놓고 머리를 맞대면 타협을 끌어낼 수 있으나 눈먼 권력 의지가 끼어들면 승자 없는 정당 양극화의 길로 치닫는다. 내일 이후엔 어떻게 싸울 건가를 고민할 때가 됐다.

이형삼 논설위원 hans@donga.com
#대선#박근혜#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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