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정치는 그래도 進化하는가

  • 동아일보

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 정치사에 새로운 기록 하나가 만들어진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직선제로 뽑힌 현직 대통령이 집권 여당의 당적(黨籍)을 유지한 채 ‘당당히’ 청와대를 걸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통령선거가 며칠 남지 않았으니 인쇄만 되지 않았을 뿐 이미 그 기록은 쓰인 것이나 다름없다.

대통령 ‘탈당 않고 퇴임’은 의미 커

대선을 앞둔 현직 대통령의 임기 말 잔혹사는 등장인물만 다를 뿐 내용은 비슷하다. 가족 친척 측근의 비리가 터져 나오면서 국민의 지탄을 받는다. 야당은 부도덕한 정권에 총체적 국정 실패라고 몰아간다. 여당도 정권 재창출 욕심에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핍박한다. 대통령은 탈당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말이 좋아 탈당이지 사실상 쫓겨나는 것이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간 길이다.

대통령의 탈당이 이뤄질 때까지의 과정은 정치적 갈등과 혼란의 연속이다. 당을 떠난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이나 마찬가지다. 그 긴 세월, 국정이 온전히 돌아가겠는가. 들리는 건 온통 악에 받친 아우성이요, 보이는 건 서로를 향한 삿대질뿐이다. 국가적 국민적 손실이 이만저만 아니다. 국민의 뇌리에 정치가 어떻게 각인될지도 뻔하다. 노무현 시대에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이런 악폐(惡弊)를 그대로 두고 새 정치를 말하는 것은 사치다.

이명박(MB) 대통령이 탈당 없이 임기를 마치게 된 데는 경제와 외교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성적을 보인 덕도 없지 않다. 더 큰 요인은 임기 내내 ‘여당 내 야당’으로 인식돼온 박근혜가 여당의 대통령후보가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MB가 세운 새 기록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줬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작지 않다.

이번 대선의 최대 화두(話頭)는 새 정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새 정치는 어느 시대나 늘 갈망의 대상이었다. 정치발전, 정치개혁, 정치혁신, 정치쇄신, 정치선진화 등 용어만 달랐을 뿐이다. 지금은 익숙해져 느끼지 못할 뿐이지 그동안 이룬 성과도 많았다. 초강력 정치자금법으로 정치와 검은돈의 쇠사슬 같은 고리를 끊은 것이 대표적이고, 그래서 정치는 진화해 왔다. 그 법을 만드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한때는 새 정치의 표상(表象)이었다.

지금은 안철수가 새 정치의 새로운 표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말만 많았지 ‘안철수 표’로 이름 붙일 만한 대표적인 쇄신안은 쉽게 안 보인다. 굳이 꼽는다면 국회의원 정수(定數) 감축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새 정치 축에 들 수 있을까. 국회의원의 기득권 축소 차원에서 낸 아이디어라면 7명이나 되는 보좌관을 줄이든지 다른 유무형의 특권들을 없애는 게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정치의 활성화나 국회 기능의 강화와도 배치된다. 성사될지도 의문이다.

안철수 ‘새 정치’는 특정 陣營에 헌납

나는 새 정치가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행태의 문제라고 본다. 물론 오세훈의 정치자금법처럼 제도의 혁신으로 행태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존재한들 존중하고 지키지 않으면 장신구나 다름없다. 국회법이 잘못돼 지금껏 국회 운영이 엉망진창이었는가. 수사제도가 모자라 권력형 비리가 만연하는가. 제도와 따로 겉돈 잘못된 행태가 정치를 왜곡시켜, 끊임없이 새 정치에 대한 갈망을 낳고 있는 것이다.

대선이 막판으로 접어들면서 흑색선전과 정치공작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가정보원 여직원 감금’ 사건이 대표적이다. 구태 선거운동 역시 선거법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새 정치를 말하는 안철수가 이런 현실에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다. 벌써 진영논리의 포로가 돼버린 것인가. 새 정치는 결코 먼 데 있지 않다. 눈앞의 잘못된 정치 행태부터 바로잡아 가는 것이 바로 정치의 진화다.

이진녕 논설위원 innyong@donga.com
#안철수#문재인#박근혜#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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