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성난 민심이 정권을 가만두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수만 가구에 길게는 2주일이 넘도록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차에 기름을 넣기 위해 3, 4시간 줄을 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나마 홀짝제였다. 지난달 말 뉴욕 뉴저지 주 등 미국 동북부에 엄습한 허리케인 샌디의 후폭풍을 현지에서 목격하면서 ‘전쟁이 벌어지면 이런 모습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계 경제의 수도’라고 불리는 뉴욕 등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직도 치유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상처는 조금씩 아물고 있다. 22일 한국의 추석과 같은 추수감사절 연휴를 맞아 맨해튼에는 매년 열리는 축하 행진이 이어졌다. 멀리서 고향을 찾은 친지들 상당수는 처참하게 부서진 집을 목격한 뒤 가족들과 이 행진을 보며 쓰라린 마음을 달랬다. 24일에는 뉴욕 시의 ‘홀짝 주유제’가 15일 만에 공식 종료됐다. 뉴욕에서 이 제도가 실시된 것은 1970년대 이후 처음이었다.
뉴저지 주의 한 주민은 지난해 허리케인 아이린이 미 동북부를 강타했을 때만 해도 정전에 대비해 자가 발전기를 구입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잘라 거부했다. 수십 년간 살면서 어쩌다 한번 찾아온 재해 때문에 비싼 장비를 구입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두 해 연속 찾아온 허리케인에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카리브 해와 대서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은 북상하면서 대부분 소멸되기 때문에 미 최대 인구 밀집지역인 동북부를 강타하는 일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 허리케인은 이 지역에 일상이 되어 버린 듯하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지구온난화에서 찾고 있다. 지구 대기가 더워지면서 허리케인은 과거엔 다다를 수 없었던 지역까지 찾아오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경고한 샌디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이라는 강한 흔적을 미국 사회에 남겼다. 지난달 6일 미 대통령 선거가 열리던 날 저녁 기자는 시카고 매코믹플레이스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오바마의 당선 연설 현장에 있었다. 2만 명 가까운 지지자가 찾은 이곳에서 확인한 오바마의 승리 요인 가운데 하나는 역설적으로 미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샌디였다.
밋 롬니 전 공화당 대선후보와의 선거 유세전이 치열하던 10월 말 오바마는 거의 모든 유세 일정을 취소하고 샌디 피해 현장으로 날아갔다. 이곳에서 10여 개의 동북부 주지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오바마가 피해 주민들의 등을 두드리는 모습은 미 국민에게 적잖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오바마 저격수’로 불리던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가 정파와 이념을 벗어나 오바마와 손을 함께 맞잡은 모습은 하이라이트였다.
크리스티 주지사는 공화당원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지만 미 동북부에서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21일 발표된 럿거스대-이글턴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의 무려 90%가 크리스티 주지사가 허리케인 샌디에 대처를 잘했다고 봤다. 그 다음이 오바마 대통령이다. 크리스티는 “왜 공화당원이면서 한창 유세전이 치열할 때 오바마에게 도움이 될 일을 했느냐”라는 질책에 한마디로 “롬니는 이곳, 쓰라린 현장을 찾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안철수 무소속 대선후보가 사퇴한 이후 한국 대선은 박근혜, 문재인 양자구도로 굳어졌다. 보수와 진보의 대결 구도 속에서 공약과 주장이 난무할 것이다. 그 속에서 유권자들은 땅에 발을 붙이고 국민의 고충을 직접 찾아가 듣고 해결하는 ‘실천형 리더’가 누구일지를 찾을 것이라 믿는다. 허리케인 샌디가 미국 사회에 남긴 교훈. 그것은 한국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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