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제균]물러나는 대통령 때리는 나라의 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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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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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정치부장
박제균 정치부장
올해 3월 21일 오전 청와대 인왕실.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오며 악수를 청했다. 짐짓 미소를 띠었지만 다소 지친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서울 핵안보정상회의(3월 26, 27일)를 앞두고 동아일보와 일본 유력지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외신 6개사 공동인터뷰 날이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내곡동 사저 터 매입의혹으로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다. 고단한 표정이 스친 것도 잠시, 인터뷰가 시작되자 정력적으로 답변을 이어나갔다. 잠시 후 그는 기자로선 가슴이 뛸 만한 얘기를 했다. “현재 한미 간에 협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미사일 사거리를 300km로 제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양국 간에 사거리를 확대하는 게 맞다는 이해가 되고 있다. 조만간 타협이 될 것으로 본다.”

인색한 미사일사거리 확대 평가

현직 대통령 발언의 파장은 컸다. 본보는 다음 날 “‘미사일 사거리 연장’ 11년 숙원 풀린다”는 기사를 1면 톱으로 다뤘다. 아사히신문도 1면 톱으로 올리는 등 국제적 핫이슈로 떠올랐다. 이 대통령이 밝힌 ‘한미 협의 진전’은 반년도 더 걸려서야 결실을 맺었다. 7일 ‘한미 미사일 사거리 협상 타결’ 뉴스가 그것이다.

뉴스는 일회성처럼 지나갔지만 그 함의는 메가톤급이다. 이제야 한국은 북한이 선제공격할 경우 전역을 탄도미사일로 보복타격할 수 있게 됐다. 전쟁 억제력을 획기적으로 높인 것. 개인적으로는 단연코 MB 정부 외교안보 분야의 제1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통령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핵안보정상회의를 열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당장 우리에게 떨어지는 국익은 외화내빈(外華內貧)이었다. 특히 이번 협상 타결은 외교안보부처보다 MB와 청와대가 직접 밀어붙여서 얻어낸 것이어서 의미가 각별하다.

하지만 사회 전반의 평가는 인색했다. 대통령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여당인 새누리당마저 “만시지탄의 느낌이 있지만 환영한다”는 논평 한 장 달랑 냈을 뿐이다. MB가 잘나가던 취임 초·중반이라도 이랬을까.

그 대신 MB는 협상 타결 발표 이틀 뒤 취임 이후 가장 주기 싫은 임명장을 줘야만 했다. 내곡동 사저 터 의혹을 수사할 이광범 특별검사 임명식이었다. 청와대는 재추천까지 요구하며 저항했지만 물러나는 대통령의 힘은 거기까지였다. 현장에선 ‘임명장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말이 없었다’고 한다. MB는 취임 땐 ‘나라 구할 영웅’인 양 치켜세우고, 퇴임 무렵엔 ‘나라 망친 퇴물’처럼 매도하는 시류에 권력무상을 곱씹었던 건 아닐까. 내곡동 사저 터 의혹을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분명 이 대통령과 가족, 그리고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청와대 참모진의 잘못이다. 하지만 잘못을 추궁하는 데도 격(格)이란 게 있다. 그 대상이 물러나는 대통령이라면 더욱 그렇다. 잘못은 가리되, 퇴임 대통령을 모욕하고 망신주려 한다면 스스로 국격(國格)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미우나 고우나 대통령은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원수’라는 게 대한민국의 헌법이요, 국기(國基)이기 때문이다.

역대정권 말이면 대통령 때리기

역대 정권 말이면 권력이 시퍼럴 때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이들이 달려들어 대통령을 때리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나라의 눈과 귀는 온통 미래권력에만 쏠린다. MB의 행보는 1년여 전에는 정치권에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무소속 안철수 후보의 숨소리보다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러니 어느 대통령도 박수 받고 청와대를 떠나지 못했다. 떠나는 대통령에게 청와대 직원들만 쳐주는 박수소리는 새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환호에 묻히곤 했다. 새로 들어오는 이보다는 떠나는 이에게, 힘 있는 자보다는 힘 빠진 자에게 더 큰 박수를 쳐 주는 게 바로 국격이다.

박제균 정치부장 phark@donga.com
#이명박#대통령#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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