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두 달 넘게 5·16, 유신 과거사 실타래를 풀지 못한 채 허둥대자 박근혜 지지율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일부 여론조사에선 양자(兩者) 대결에서도 야권의 문재인 안철수에게 모두 뒤진다는 경고음까지 울렸다. 박근혜가 24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며 고개를 숙인 것도 더는 이상기류를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박근혜를 보면 10년 전 이회창이 어른거린다”고 말한다. 박근혜 측은 2002년 이회창 모델을 떠올리기 싫은 실패 사례로 본다. 하지만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속설(俗說)을 떠올릴 만한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2002년 당시 박근혜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을 장악한 이회창을 향해 당권-대권 분리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이회창의 호응이 없자 박근혜는 이회창을 ‘제왕적 총재’라고 비판하며 탈당했다. 이회창은 뒤늦게 박근혜 정치개혁 요구 일부를 수용하며 국면 반전을 꾀했으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퇴행적 이미지가 부각됐다. 10년이 지나 이회창의 자리에 앉은 박근혜도 과거사 국면에서 야당의 파상 공세에 떠밀린 느낌이다. 후보 선출 직후 선보였던 대통합 행보는 ‘반짝 인기’로 끝나버린 듯하다.
10년 전 이회창 캠프는 국민보다 내부 정치에 더 골몰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회창 대세론을 업고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집권 후 ‘자리’를 선점하기 위한 충성경쟁에 불이 붙었던 것이다. 당시 몇몇 중진들은 공공연히 ‘초대 국무총리’ ‘초대 ○○장관’을 보장받기 위해 뛰었다. 홍보 캠페인이 갈팡질팡하자 측근들의 견제를 받던 윤여준 씨를 긴급 소방수로 차출한 것은 대선일이 불과 한 달도 안 남았을 때였다. 하지만 이미 버스가 지나간 뒤 손 흔드는 꼴이었다.
요즘 박근혜 캠프 주변에서도 10년 전 상황이 재연되는 분위기다. 박근혜 캠프 대변인이 된 김재원이 기자들에게 “박근혜가 정치를 하는 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박근혜를 ‘의식한’ 발언이다. 김재원이 부인하긴 했지만 이 발언은 박근혜 캠프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드러냈다는 관측이다. ‘국민 눈높이’는 구호에 그치고, 오로지 ‘보스’의 심기 경호만 기승을 부리는 상황이다. 어설픈 과시욕과 과도한 충성경쟁은 박근혜 주변에 ‘인(人)의 장막’을 치게 된다. 능력과 역할을 따지기 보다는 박근혜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어야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도는 것도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이명박은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 정권에 염증을 느낀 호남 출신 유권자와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상당한 우군(友軍)을 확보했다. 이들이 이른바 ‘이명박 민주당원’이다. 결국 중도층 외연을 넓혀 대선에서 민주당 정동영을 530만 표 차로 압도할 수 있었던 힘이 됐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안철수가 보수 성향의 지지자들까지 끌어들여 ‘안철수 우파’란 신조어가 생긴 것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니다. 대선은 중간 지대는 물론이고 동요하는 상대 진영의 지지층까지 끌어들이는 전면전이다. 박근혜가 고정 지지층을 굳히면서도 중간 지대로 외연을 넓히지 못하면 10년 전 이회창의 ‘확장 한계’란 전철을 밟게 되는 것이다.
야권의 문재인 안철수 단일화는 이제 상수(常數)로 봐야 한다. 10월 말이나 11월에 펼쳐질 야권후보 단일화로 대선구도는 또다시 요동칠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더 유리한지 따지는 발상은 2002년 이회창 캠프가 노무현 정몽준을 놓고 저울질했던 상황과 똑같다. 박근혜 스스로 더 변화하면서 국민에게 더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이 본선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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