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재헌]해외플랜트 저가 수주 자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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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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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헌 한국플랜트학회 회장 한양대 교수
이재헌 한국플랜트학회 회장 한양대 교수
해외 플랜트 사업이란 해외에 공장을 지어주는 건설 비즈니스의 일종이다. 해외 플랜트 수주가 활발해지면서 국내 플랜트EPC(설계·조달·시공) 기업 사이의 과당·불공정 경쟁에 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최근 한 플랜트EPC 기업의 저가 수주 명세가 공개됐다. 실적이 상당한 대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 석유화학플랜트와 발전플랜트 프로젝트에서 평시 대비 60%, 50%에 불과한 저가로 수주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웬만한 플랜트EPC 프로젝트 총액은 1조 원을 넘는다. 적정 사업비보다 수천억 원 싸게 수주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자기 돈으로 남의 공장 지어주는 꼴’이다.

플랜트EPC 사업 경력이 우리보다 수십 년 많은 해외의 선진 기업들은 적정 사업비에 근거해 입찰에 참여하는 원칙을 지키며, 상대적으로 낮은 금액으로 시장을 파고드는 한국 기업이 얼마나 지속가능할지를 지켜보고 있다. 한국 기업 간의 ‘치킨게임’을 목도한 해외 발주처 일부는 노골적으로 과당경쟁을 유도하고 입찰가 인하를 부채질한다. 이런 사태는 수주 기업은 물론이고 국익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된다. 정상가로 입찰하려는 다른 국내 기업의 경영에도 나쁜 영향을 미침으로써 한국 플랜트EPC산업의 기반을 와해할 우려가 크다.

저가 수주를 감행한 기업은 중국이나 인도 등 후발주자의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 그동안 쌓은 기술력으로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이유로 내세운다. 그러나 선진 기업이 긴 시간 사업을 영위해온 것은 단기적인 시각을 갖지 않았다는 데 힘입은 영향이 크다. 눈앞의 성과에만 연연한 저가 수주는 자칫 기업의 생존 자체를 송두리째 위협할 수 있음을 선진 기업들은 알고 있다.

위기에 처했다는 데 공감하는 많은 국내 플랜트EPC 기업이 ‘윤리 규범’을 통한 자구 노력에 참여하고 있다. 규범의 핵심은 다른 국내 기업이 사전에 다져놓은 프로젝트를 사후에 부당하게 가로채지 말자는 것이다. 경쟁사의 내부 추문을 발주처나 현지 언론에 알리지 말자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상식적으로 지켜야 할 사업규범이지만 동참하기를 외면하는 기업도 일부 있다. 기업 스스로 자정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국익 보호 차원에서 정부가 나서야 한다. 때마침 최근 ‘제2의 중동 바람’에 대비해 해외 프로젝트 수주 활성화 방안의 후속 조치로 4대 국책 금융기관이 사업비 2조 원 이상인 해외 프로젝트를 공동 지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부당하게 수주하려는 프로젝트를 금융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면 보다 가시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유수의 국내 플랜트EPC 기업에 문제가 생길 때 피해 범위는 엄청나다. 이 피해를 누가 수습할 것인가. 대형 EPC 기업이 대부분 대기업 계열사이므로 대기업이 무한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봉급을 받는 수주 책임자는 사퇴 정도의 책임밖에 질 수 없으니 수행 책임자와 기업 오너가 피해 보상으로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이에 더해 관련 기자재 제조 기업, 관련 전문건설사, 관련 금융기관 등이 줄줄이 연루될 수 있고, 이는 국가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나라 해외 플랜트 수주 사업의 기반은 국내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 계열사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잘못되면 도미노 현상이 생길까 우려된다. 어느 기업이라도 한국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저가 수주가 어렵게 이뤄 놓은 해외 플랜트 전성기의 기반을 흔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내 가게에서 조금 더 벌자고 옆집을 헐뜯고 다니면 골목 식당은 다 같이 망하게 된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 기업가의 숙제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재헌 한국플랜트학회 회장 한양대 교수
#해외플랜트#저가 수주#건설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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