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혁백]천시는 인화를 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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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맹자는 말했다.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 4·11총선 결과는 맹자의 경구를 증명했다. 이번 총선은 ‘코리안 앵거(분노)’가 표출된 2011년 가을의 주민투표와 서울시장 선거의 기억이 생생한 가운데 치러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4·11총선의 천시는 야당연대에 있다고 예측했다. 현 정부와 집권여당, 대통령 측근들의 부정과 비리,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선관위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 사건 같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공정선거 방해 사건, 방송 3사 파업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언론 자유 침해로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87위로 추락한 민주주의의 후퇴, 무엇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으로 인한 빈부 격차의 확대와 양극화 사회의 심화로 유권자들의 분노는 정부와 여당을 한묶음으로 심판할 것이기에 천시는 야당연대에 있고 집권여당은 100석도 건지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가 대세를 이뤘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강고하게 남아 있는 지역주의로 대표되는 지리와 박근혜의 ‘선거의 여왕’ 리더십으로 대표되는 인화가 야당이 갖고 있던 천시를 누른 것으로 나타났다.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과반인 152석을 얻었고 텃밭인 영남에 더해 지역 영주가 사라진 충청, 강원을 석권하는 승리를 거뒀다. 선거기간에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터져 천시의 이로움을 더 가지게 되었음에도 야당연대가 패배한 것은 국민의 마음을 얻는 ‘인화’ 확보 경쟁에서 박근혜에게 뒤졌기 때문이다.

野연대, 천시만 믿고 여당처럼 행동


먼저, 박근혜는 작고 빨랐다. 그녀는 거대 여당을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유목형 슬림조직으로 바꾸고 재빠르게 유권자의 요구를 수용하고 선거 현장으로 뛰어가 유세를 진두지휘했다. 박근혜의 비대위는 2004년 천막당사 이전에 버금가는 슬림형 리더십을 상징했다. 반면 야당연대 진영에서는 구심점 없이 대선 잠룡들이 각개약진하고 계파 보스들이 합의해 세운 실권 없는 한명숙 대표만 전국을 돌아다니며 고군분투했다.

둘째, 박근혜의 선거 캠페인은 재창조적(reinventing)이었고 혁신적이었다. 그녀는 재창당을 하지 않으면서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꿔 현 정권과 한나라당의 실정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 했고, 보수라는 용어는 삭제하지 않으면서 정강정책을 수정해 국민들에게 여당이 뼛속까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복지와 일자리 창출을 핵심으로 하는 새 정강정책을 내놓고 미소 짓는 입술 모양으로 당 로고도 바꿨다. 재창조와 혁신은 야당의 몫이었고 여당은 야당의 공격을 선방해 수성하는 데 몰두했던 이제까지의 선거 양태가 뒤바뀌었고 유권자들은 새누리당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반면에 야당연대는 천시만 믿고 이미 과반수를 확보한 여당처럼 선거운동을 했다. 야당은 계파별 나눠 먹기식 공천을 하는 구태를 연출했고, 경선 부정이 있었으며, 야당 후보와 지지자들의 입에서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막말이 난무했다. 야당의 전유물이었던 복지 이슈는 구호만 있고 실행계획이 없었다. ‘1% 대 99%’ 사회에서 99%를 묶어내고 연대할 수 있는 구체적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박근혜식 복지와 차별화하는 데 실패했다. 복지 이슈에서도 공격과 수비가 바뀌었다.

셋째, 박근혜의 ‘미래권력 대망론’이 야당의 ‘과거정권 심판론’을 이겼다. 야당은 집권세력을 심판하자고 한 데 반해 박근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정마을 등 핵심적인 현 정권 심판 이슈를 노무현 정권과 연결시키는 물타기를 통해 과거 심판론을 ‘반쪽 심판론’으로 만든 뒤 은연중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이용해 12월에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려면 새누리당 후보를 찍어 달라는 미래권력론, 즉 대선과 총선을 연결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런데 선거기간에 민간인 사찰 사건이 터지면서 과거 심판론이 이번 총선을 종결지을 것으로 예측됐으나 투표를 며칠 앞두고 김용민 막말 파동이 일파만파로 번져 SNS 보급률이 가장 낮은 충청과 강원지방의 보수층을 결집하면서 박근혜에게 완승을 안겨 주었다.

대선 이기려면 ‘어진 지도자’선택해야


‘박근혜의,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를 위한 선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번 총선은 박근혜의 인화가 야당연대의 천시를 누른 선거다. 그러나 4·11총선은 12월 대선으로 가는 전초전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야당연합이 완패한 것이 아니다. 정당투표에서 야당연대의 득표율 46.6%는 새누리당과 자유선진당을 합친 득표율 46%를 앞섰다. 여러 악재에도 천시는 여전히 야당연대에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국민들은 변화를 바라고 있고 이런 변화의 열망을 조직해 미래의 정책과 비전을 제시해 줄 지도자를 대망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야당이 패배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안주’를 선택한 데 있다. 정권을 탈환하겠다는 야당이 안주를 택한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다. 야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길은 변화를 이끌 인화의 지도자를 후보로 선택하는 것이다. ‘어진 지도자를 이긴 적은 없다(仁者無敵).’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동아광장#임혁백#총선#대선#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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