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이 카페는 가시면 피곤해요. 카페 안에서는 영어만 써야 하거든요. 커피 살 때도 그렇고….”
2009년 7월 서울시를 담당하게 된 기자에게 현안을 인계해 주던 전임 후배 기자가 선배의 짧은 영어 실력을 걱정하며 당부했던 말이다. 서울시 서소문청사 내에 있던 ‘파인트리’라는 카페는 서울시 공무원의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영어만 사용하게 했던 공간이다. 당시 오세훈 시장의 주문에 따른 조치였다. 공무원을 위한 영어 교육 프로그램만 운영하다가 나중에는 일반 시민도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커피를 살 때도 그렇고 대화를 나눌 때도 이 공간에서는 영어만 써야 했다. 한국어로 대화하다가는 쫓겨나진 않더라도 종업원에게 눈총을 받아야 했다. 불가피하게 이곳을 이용하게 되면 대부분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이후 파인트리는 지난달 28일 ‘뜨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쟁력을 키운다는 목표는 사라지고 장애인 고용과 소통 휴식이라는 소박한 운영방식이 도입됐다. 내부는 북카페로 꾸몄고 영어 사용 원칙도 사라졌다. 누구나 찾아와 유명 브랜드 수준의 커피를 반값에 마실 수 있는 편안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기자도 요즘에는 영어 걱정 없이 편안하게 이곳을 찾는다. ‘경쟁’이 사라진 자리는 참 편안해 보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경쟁’이라는 짐을 내려놓으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다른 사람들의 경쟁은 치열할수록 보는 이가 즐거운 것과 정반대다. 요즘 같은 선거 정국에서는 접전지가 관심을 모은다. 투표함을 열어볼 필요도 없는 곳은 눈길도 안 간다. 거물을 꺾은 신예에게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중책도 맡긴다.
방송가의 대세인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매주 한 명씩 무대에서 사라지는 프로그램은 비정함 그 자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최고의 실력을 보여줘도 경쟁자에게 밀리면 탈락의 쓴잔을 마셔야 한다. 시청자들은 경쟁이 치열할수록, 잘난 사람이 더 잘난 사람에게 밀려날수록 즐거워한다. 경쟁을 이겨내면 역시 자신만의 화려한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 정치나 연예나 ‘경쟁의 과실’은 참 달다.
스포츠나 공부도 그렇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선수와 인재가 그 분야의 성장을 이끌 재목이 된다. 이런 인재가 많은 회사에서는 남들보다 크고 달콤한 열매를 얻는 혜택이 있다. 다들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사가 바로 그런 회사다.
경쟁에는 이처럼 두 가지 맛이 있다. 내가 참여하는 경쟁의 과정은 쓰디쓰지만 경쟁을 이겨낸 승자가 즐기는 열매는 달콤하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당도(糖度)는 높다. 편안함과 여유는 그때뿐이지만 승리의 달콤함은 오래간다.
‘경쟁력 강화’가 많은 이들을 지치고 힘들게 한 것도 맞다. 오 전 시장이 시정 전반의 목표로 내건 이 구호 탓에 서울시 공무원은 늘 피곤했다. 그래도 외국 관광객 1000만 명 시대가 앞당겨졌고 한강에는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해졌다. 해외 다른 도시들과 경쟁해 여성정책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유엔 공공행정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열매를 맺기까지 힘겹게 애쓴 공무원을 위로하려는 박 시장의 따스한 마음도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관광 경쟁력을 높이는 한강르네상스 사업을 백지화하고 서해뱃길 사업까지 원점으로 돌리는 게 미래의 열매를 기약하는 일이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조금 고통스러워도 훗날 생기는 달콤한 열매가 1000만 시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울시가 상징적으로 영어 카페, 아니 한강의 어느 사업 하나쯤은 남겨뒀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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