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정양환]‘평범한 나라’가 되는 길

  • Array
  • 입력 2012년 4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정양환 국제부 기자
정양환 국제부 기자
지난주 세계의 이목이 가장 집중된 국제행사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였다. 하지만 비슷한 타이밍에 중동의 사막에서도 꽤 의미 있는 회합이 열렸다. 이슬람 22개국이 가입한 아랍연맹(AL) 정기총회였다.

해마다 여는 모임이 뭐 특별할까 싶지만, 장소가 다름 아닌 바그다드였다. 2003년 3월 이라크전쟁 발발 뒤 첫 국제회의니 짧게 잡아도 9년 만이다. 이라크 정부도 감회가 새로웠나보다. 누리 알말리키 총리는 “제2의 건국이 시작됐다”며 다소 과한 자평을 내놓았다. 총회가 열린 한 주를 몽땅 공휴일로 선포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의전을 준비했다는 행사 분위기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공항은 세련되게 정돈됐고, 도로는 싱그러운 야자수와 연분홍 피튜니아 꽃들로 자태를 뽐냈다. 옛 대통령 궁들을 개조한 회의장과 숙소는 샹들리에와 대리석으로 번쩍거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행사장 내부를 꾸민 꽃값만 100만 달러(약 11억3000만 원)가 들었다.

외교적 성과도 쏠쏠했다. 이라크는 오랜 앙숙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안보협약을 맺고 자국민 수감자 교환을 약속했다. 쿠웨이트와는 1990년 이후 처음으로 여객기 직항노선을 다시 개통하기로 했다. 이집트와도 상호 동반자 지위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다른 참가국들도 ‘깜짝 부활’ ‘새로운 도약’이라며 이라크에 립서비스를 한가득 안겼다.

하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은 참가국 대표들이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은 게 있다. 본 회의장에서 반경 수km 거리에 둘러친 길고긴 시멘트벽이었다. 이라크 정부는 이 울타리 안쪽에 ‘인터내셔널 존’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그 너머엔 뭐가 있을까. 누구나 짐작하듯 “진짜 이라크의 현실”이다.

행사 기간 바깥을 둘러본 뉴욕타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그다드는 “지난해 미군 철수 직후보다 더 절망적인 풍경”이었다. 폭삭 내려앉은 빌딩들, 불에 탄 자동차. 시민들의 눈빛은 멍하거나 독기가 서렸다. 안 그래도 부족하던 전기와 수도는 아랍연맹 총회에 갖다 쓰느라 하루 4시간 사용으로 제한됐다. 개회식 전날 밤에만 자살폭탄테러로 52명이 목숨을 잃었다. 말 그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였다.

물론 이라크로선 외교는 중요한 지상과제다.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 시절 주변국을 호령하던 위세는 사라진 지 오래. 시아파 종주인 이란이 호시탐탐 군침을 흘리는 상황에서 다른 아랍국과의 관계 개선은 꼭 필요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건국 이래 한 번도 인정한 적 없던 쿠웨이트와의 국경 조정에 대한 유엔 중재까지 받아들였을까.

그렇다 해도 이라크가 치른 거창한 행사는 도가 지나쳤다. 국민들이 허기지고 안전을 위협받는데 호화장식이 웬말인가. 숙소에 샹들리에가 없다고 참가국들이 외교적 무례라 성토했을 리도 없다. 이라크 정부는 총회가 끝난 뒤 참석 명부를 찬찬히 살펴봤어야 한다. 그렇게 공을 들였건만 회원국 대부분은 ‘안전을 이유로’ 정부수반은커녕 고위각료도 보내질 않았다. 호시야르 지바리 이라크 외교장관은 “이번 행사에 ‘평범한 나라(normal country)’가 되고픈 이라크의 심정을 담았다”고 말했다. 평범한 나라가 뭔지 모르지만, 대리석 깐다고 될 것 같진 않다. 어떤 나라건, 그 근간은 국민이다.

정양환 국제부 기자 ray@donga.com
#핵안보정상회의#이라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