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오늘의 아우슈비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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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 문화부장
유윤종 문화부장
“아우슈비츠 이후에 문학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던진 사람은 독일 미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였다. 솜털 보송한 중학생 시절 그 구절을 처음 보았을 때 ‘웃기는 소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따뜻함도, 배부름도, 문학도, 예술도 박탈당한 채 죽어간 사람들은 어떤 세상을 갈망했을까. 배부름과 온기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예술이 가까이 있는 세상이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바르샤바 게토(유대인 격리구역)에 갇혔던 청년 마르셀은 그 숨 막히는 곳에서도 간간이 열리는 음악회가 한 줄기 숨통을 터주었다고 회상했다. 거기서 그는 시를 읊고 문학을 논했다. 최후까지 남은 유대인들을 독일군이 아우슈비츠 못지않게 악명 높은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끌고 가기 직전 그는 탈출했고 훗날 독일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되었다. 200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도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경험이 자신의 문학적 자양분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문학은, 예술은 가능하다. 아니, 극한상황에서 예술은 더욱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인간이 인간을 말살하는 인간성의 실종 속에서 예술조차 의미를 갖느냐’는 물음은 도덕적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양심의 외침이 인류에게 던지는 빛이며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찾는 서치라이트다.

여기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인간은 본성에 내재된 악을 히틀러와 나치에 모두 투사하고 소각해 버린 뒤 이제 선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는가. 오늘의 인류가 처한 상황은 ‘아우슈비츠 이후’인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진 수십 명의 인간이 오늘도 생명과 존엄을 위협당하는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도 우리는 돌아온 봄을 환영하며 나들이를 갔고 식사를 즐겼으며 TV를 보고 깔깔거렸다. 기자도 마찬가지고 이를 탓할 엄두는 없다.

그러는 동안 탈북자 강제 북송 중단을 위해 단식농성을 하던 국회의원 한 사람이 병원에 실려 갔다. ‘응원자’는 많았으나 그의 투쟁에 동참한 정치권 인사는 없었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가 지난달 24일 탈북자 강제 북송 중단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성과라 할 만하지만 최근 몇 년간 미국 외에 유럽연합,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의회까지 탈북자들의 상황을 청취했는데도 우리 국회는 단 한 번도 탈북자 청문회를 연 적이 없다.

공간으로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사라져 기념관이 되었다. 그러나 상징과 개념으로서의 아우슈비츠는 사라지지 않았다. 글을 쓰고 있는 이곳에서 한 시간 남짓 자동차로 달려가면 닿을 수 있는 국가에서 사람들이 꿈과 자유를 몰수당한 채 살아간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총 20만으로 추산되는 사람이 그 수용소 국가 안에 설치된 진짜 아우슈비츠형(形) 수용소에서 짐승처럼 살다 죽어간다.

그래도 우리는 ‘경계 밖’으로 치부한 사람들의 생명과 존엄보다는 부잣집 아이들까지 점심을 공짜로 먹어야 되느냐 아니냐는 문제에 더 몰두한다. TV에서는 ‘목장에서 행복하게 뛰놀며 자란 소들’에게서 짠 우유를 광고한다. 그런 우유를 마시면서 소들에게는 마음의 빚을 덜겠지만 정작 같은 핏줄의 형제들이 처한 현실에는 우리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언젠가 저 공포의 국가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낱낱이 드러나고 중국에서 강제 북송된 사람들이 마주쳤던 일들이 밝혀지면 우리는 그때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다고 말해야 할까.

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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