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성호의 옛집 읽기]<22>‘전통의 새 모색’ 농암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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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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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청 제공
안동시청 제공
어느 날 피아노잡이 임동창은 임하댐 수몰지구를 지나다 건기에 물이 줄어들자 수면으로 얌전히 솟아나온 고가를 본다. 뭔가 먹먹해진 그는 트럭을 몰고 와 짐칸에 천막을 치고 한바탕 공연을 펼쳤다. 집을 위한 위령제였을까? 시절이 수상하면 많은 사람이 다친다. 이 와중에 집이라고 온전하겠는가.

농암종택은 영천 이씨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1467∼1555)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지금 이 집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에 있지만 원래는 더 하류 쪽인 도산서원 근처 부내라는 곳에 있었다. 과거의 사진을 보면 굉장히 짜임새가 있는 종택이었고, 별당인 긍구당(肯構堂)은 마치 독락당의 계정처럼 담 밖으로 튀어나와 있어 너른 문전옥답을 지나쳐 낙동강이 바라다 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집의 첫 번째 시련은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난 다음에 왔다. 마을에 신작로가 생기면서 농암의 정자인 애일당을 영지산 위쪽으로 옮긴 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안동댐이 생기면서 부내 일대가 물에 잠기게 되자 농암종택의 집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이 와중에 농암의 17대손은 흩어진 집들을 모으고 종가를 복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마침내 지금의 자리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부내의 지형과 흡사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 일대의 터를 사들이는 것에서부터, 다시 흩어진 집들을 해체하고 모아서 복원한 것이 지금의 농암종택이다. 집뿐만이 아니라 바위에 새겨진 각자도 바위를 캐기가 불가능하자 일일이 떼어다 놓았다. 집을 보존하기 위한 농암종가의 노력은 피눈물 나는 것이었으리라.

긍구당이란 당호 자체가 ‘조상의 유업을 길이 잇는다’는 뜻이니, 후손들은 농암의 말을 그대로 실현하며 살았던 셈이다. 당대의 명필 신잠이 쓴 긍구당의 현판은 오만하고, 당당하고, 유려하다. 농암도 그랬을까. 그는 스스로 농부를 자처하며 유유자적 말년을 보냈다. 당시 부내를 소요하던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유선이라 불렀다. 지금 복원된 종택의 배치도 휑하리만큼 널찍하다. 그리고 거기에 종손들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넣었다. 종택을 ‘고가옥 활용 프로그램’에 따라 게스트하우스로 개방했다.

내가 들렀을 때는 마침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상처 입은 전통을 추슬러 새로운 종가의 활용 방식을 찾은 것이다. 농암종택은 그렇게 조상의 유업을 이어가고 있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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