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택]‘부러진 화살’ 영화와 재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9일 20시 00분


권순택 논설위원
권순택 논설위원
영화 ‘부러진 화살’은 2007년 1월 발생한 현직 판사에 대한 석궁 테러 사건의 전말과 전직 사립대 수학과 교수 김명호 씨에 대한 재판 과정을 소재로 삼았다. 직업적 관심 때문에 개봉하는 날 영화를 봤더니 ‘사법부를 고발한 법정 실화극’이라는 홍보가 먹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법률적으로 이 사건은 2008년 6월 대법원에서 김 씨에게 징역 4년형이 확정됨으로써 종료됐다. 김 씨는 1년 전에 이미 만기 출소했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 것도 없다. 하지만 역시 법률적으로 끝났던 광주 장애인학교 성폭행사건이 지난해 영화 ‘도가니’를 계기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부러진 화살’의 파장도 예단(豫斷)하기 어렵다.

영화는 김 씨가 1995년 1월 사립대 입시문제 오류 논란으로 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복직소송을 거쳐 석궁 사건으로 실형을 살고 출소하기까지 16년에 걸친 사연을 다뤘다. 그 복잡한 스토리를 100분짜리 영화로 만들었다. 재판 과정을 단순화하고 특정 부분을 부각하다 보니 오해의 소지도 있다. 석궁 사건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벌어진 논란을 집중 부각한 것도 그렇다. 대법원 관계자는 “항소심은 수사와 형사 소송 절차에 따라 진행된 1심 재판을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라며 “재판 기록을 보지 않고 항소심의 특정 국면만 부각하면 소송 전체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인공 김 씨는 독학한 법률 지식을 무기로 법정에서 사사건건 ‘법대로 하자’고 주장한다. 검사와 판사에게 수시로 ‘직무유기로 고발한다’고 호통친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알코올중독자 변호사가 김 씨에게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라고 말할 정도다. 그는 그동안 100건이 넘는 헌법 소원을 제기했지만 대부분 헌법재판소 문턱도 넘지 못한 채 각하됐다. 그런 김 씨가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판사를 석궁으로 위협하고 ‘법대로’를 외치니 설득력이 떨어진다.

영화에서 재판의 핵심 쟁점인 석궁 발사의 고의성 여부, 부러진 화살의 분실, 피해 판사 와이셔츠에 혈흔이 없는 점 등은 1, 2심과 대법원에서 이미 다뤄졌다. 대법원은 “현장에서 체포된 현행범이고, 목격자 진술과 물적 증거 등을 근거로 범행이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결론지었다.

피해자가 현직 판사였기 때문인지 재판 과정에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영화를 보고 김 씨 재판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은 게 사실이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시나리오에 깔고 ‘국민배우’ 안성기 씨에게 김 씨 역을 맡기고 피해 판사와 재판장에는 악역 전문 배우나 비호감 배우를 캐스팅한 감독의 의도가 적중한 셈이다.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면서 사법부를 실컷 욕보인 뒤 ‘영화 속 등장인물과 에피소드는 영화식으로 재창조했다’는 면피성 자막으로 영화 내용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를 모호하게 한 것은 창작의 자유와 한계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영화 때문에 명예가 훼손된 당사자들이 소송을 제기해 진실을 가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법부 안팎에 법치를 훼손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유죄가 확정돼 수감된 정치인이나 국회에서 최루탄 테러를 가한 국회의원을 영웅시하는 건 법치주의에 대한 모독이다. 사법부 내에도 튀는 판사와 막말 판사들이 스스로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 ‘부러진 화살’이 법치주의의 정신을 훼손하는 또 하나의 소재로 이용되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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